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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해외)/7. 대만

대만여행 18-8 중정기념관

식사후 찾은곳은 중정기념관

대만 초대총독 장개석을 기념하는곳이다. 1975년 장개석이 사망했을때 부인 송미령여사가 장개석을 기념하는 기념관을 지으려 모금을 하였을때 천문학적인 돈이 걷혔다고 한다.

그만큼 장개석은 대만인의 추앙을 받는 인물.

 

옆문으로 들어섰을때는 그냥 평범한 산책로처럼 보인다.

 

 

 

높이 70m나되는 거대한 기념관이 나타난다. 중정은 장개석의 본명인데 당초엔 중정기념관으로 이름하였다가 대만 정권이 바뀐후엔 민주기념관으로 불렸다가 지금은 다시 중정기념관으로 불리고 있다.

 

내부의 모습. 여타 박물관은 사진촬영이 엄격히 금지되는데 이곳 기념관은 사진촬영에 제약이 없었다.

 

 

3층에 장개석의 거대한 동상이 보인다.
본명 중정[中正]. 저장성[浙江省] 펑화현[奉化縣]에서 출생하였다. 1906년 바오딩[保定]군관학교에 입학하고 다음해 일본으로 유학 갔다. 그 무렵 중국혁명동맹회에 가입하고 1911년 신해혁명에 참가하였다. 1918년 쑨원[孫文]의 휘하에 들어가 주로 군사면에서 활약하고 1923년 소련을 방문, 적군(赤軍)에 대해 연구하였다. 1924년 황푸군관학교 교장, 1926년 국민혁명군 총사령에 취임하여 북벌을 개시하였다.

1927년 상하이쿠데타를 일으켜 공산당을 탄압하였으며 1928년 베이징[北京]을 점령하였다. 난징[南京] 국민정부 주석과 육·해·공군 총사령이 되어 당과 정부의 지배권을 확립하였으며, 한편으로는 광둥[廣東]·광시[廣西]의 군벌들과 펑위샹[馮玉祥]·옌시산[閻錫山] 등 지방군벌을 누르고, 1930년부터는 5회에 걸쳐 대규모 중국공산당 포위전을 수행하였다. 또한 만주사변 후 일본의 침공에 대해서는 '우선 내정을 안정시키고 후에 외적을 물리친다'는 방침을 세워 군벌을 이용, 오로지 국내통일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내전정지(內戰停止) 일치항일(一致抗日)'을 외치는 여론이 높아진 가운데 1936년 독전(督戰)을 위하여 시안[西安]에 갔다가 장쉐량[張學良] 군대에 감금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으며, 그 결과 1937년 국공(國共)합작으로 육·해·공군 총사령관의 책임을 맡고 전면적인 항일전을 개시하였다. 항일전쟁 중에는 국민정부 주석, 국민당 총재, 군사위원회 주석, 육·해·공군 대원수 등의 요직을 겸직하여 최고권력자로 군림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 1946년 다시 중국공산당과 결별하고 내전을 개시하였다. 처음에는 우세하였으나 1949년 12월 완전히 패퇴하여 본토로부터 타이완[臺灣]으로 정부를 옮겨 미국과의 유대를 더욱 강화하고, '자유중국' '대륙반공'을 제창하며 중화민국 총통과 국민당 총재로서 타이완을 지배하였다.

저서에 《장중정전집(蔣中正全集)》(상·하권) 《장총통언론휘편(蔣總統言論彙編)》(24권) 등이 있다. 195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한민국의 독립을 지원한 공로가 인정되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장개석은 지금으로치면 꽃미남형. 송미령여사는 세번째부인이다.

 

 

마침 가이드가 촬영을 잘 해주어 몇컷의 단체사진을 촬영할수 있었다. 대부분 박물관및 기념관은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는데 이곳 중정기념관엔 사진촬영의 제한이 없어서 Good

 

 

 

중정기념관 중앙홀에는 거대한 대만국기가 그려져있다.

 

중정기념관 정문 양옆에는 커다란 홀 두곳이 있는데 음악회등의 다양한 행사를 하는곳이라 한다.

 

 

 

 

 

 

홀에서 사진촬영을 마친후 다시 1층으로와서 본격적으로 기념관을 둘러보았다. 사진은 중정과 부인 송미령여사.
송미령여사는 광둥성[廣東省]에서 태어났다. 저장재벌[浙江財閥] 송씨가(宋氏家)의 3자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미국 웨슬리대학을 졸업하고 1927년 장제스[蔣介石]와 결혼하였다. 그 후 장제스의 통역으로 활약, 대미관계 조정에 수완을 발휘하였다. 국민정부 입법위원·항공위원회 위원·비서장·부녀협회 실생활운동 이사장을 역임하는 등 폭넓게 활약하였는데, 이재(理財)에도 밝다는 평을 들었다. 1936년 시안[西安]사건 때는 강경파의 의견을 제지, 시안으로 들어가 장쉐량[張學良]과 단독면담을 한 끝에 장제스를 석방시켜 역량을 과시하였다. 항일전(抗日戰)과 공산당과의 내전 중에는 상이병 간호·난민대책 등을 지휘하는 한편, 1942년 미국 각지를 돌며 지원강화를 호소하였다. 1943년 카이로회담 때는 장제스를 수행하였다.

1950년 타이완으로 건너간 후에는 국민당 중앙평의위원, 타이완부녀반공항소연합회[臺灣婦女反共抗蘇連合會]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1975년 장제스 사망 이후에는 10년간 미국에서 살면서 타이완과 미국과의 유대강화에 힘썼다. 1986년 장제스 탄생 100주년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하여 귀국, 이후 타이베이[臺北]에서 살았다. 그후 1991년 장기요양을 위하여 다시 미국에서 살다가 2003년 뉴욕에서 사망하였다. 1966년 대한민국의 독립을 지원한 공으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장개석의 가족사진.

 

 

 

장인이 교인이었다는것 같다. 장개석이 애독하던 성경책모습니다. 두가지 색이 나오는 색연필이 눈에 설다.

 

장개석부인 송미령은 두 언니를 두고있었는데 첫번째언니는 상해의 갑부에게, 둘째언니는 손문의 부인이다. 송미령은 당초 상해 시장과 혼인할 예정이었으나 큰언니의 조언을 듣고 장개석과 결혼하였다고 한다.

 

 

 

작은 글씨로 그려진 장개석 초상화.

 

장개석총통이 타고다니던 승용차.

 

 

 

 

 

 

 

이것역시 장총통이 사용하던차인데 먼저차량보다 늦게 구입한 차량이란다.

 

대만건설현장에서의 장총통과 송미령.

 

 

송미령여사는 그림그리기를 좋아하고 실력이 탁월했던반면 장개석은 글을 잘 썻다고 한다.
송미령씨의 그림에 장개석이 글을 쓴것.

박정희대통령과 환담하는 장개석 총통.

 

장 총통의 집무실광경.
장개석은 독단적 성격으로 대만백성을 통치한반면 아들 장경국은 온건한 정책을 벌여 대만사람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장개석의 이야기는 무궁무진한데 이야기를 어디에서부터 풀어야할지.. 나의 작은 지식으론 풀기조차 힘들다.

 

중정기념관을 나서며....

 

중정기념관 입구에 있는 공연장이다. 좌우에 똑같은 건물이 세워져 있다.

 

 

대만에서 최대의 볼거리는 이곳 중정기념관, 국립고궁박물관 그리고 태로각인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