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덕사 그리고 수덕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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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목적지 덕숭산수덕사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의 본사이다. 창건이나 그 이후 역사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없어 절의 연혁을 알 수 없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말 숭제법사(崇濟法師)가 창건하고 고려 공민왕 때 나옹(懶翁)이 중수했다고 하며, 일설에는 백제 599년(법왕 1)에 지명법사(智命法師)가 창건하고 원효가 중수했다고도 한다. 조선시대말에 경허(鏡虛)가 선풍(禪風)을 일으킨 뒤 1898년(고종 35) 그의 제자인 만공(滿空)의 중창으로 번성하여 현재 36개 말사를 관장하고 있다.

 

수덕사하면 떠오르는 일엽스님이 있다.

김일엽(金一葉, 1896년 4월 28일 ~ 1971년 2월 1일)은 일제 강점기의 여성운동가, 언론인, 시인이자 대한민국불교 승려이며 시인 겸 수필가이다. 정조는 육체가 아닌 정신에 있다는 ‘신정조론’을 주장하였고[1], 순결의 무의미함을 주장했다.[2] 일본 유학 중에 만난 친구 춘원 이광수일본의 여성작가 히구치 이치요(桶口一葉)의 이름에서 따와 지어준 필명을 따서 일엽이라는 필명을 썼다.

목사의 딸로 태어나 일찍이 고아가 되었으나, 어머니와 외할머니의 배려로 삼숭보통고등학교를 마쳤다. 그 뒤 1913년 이화학당에서 신학문을 배웠다. 1918년 이화학당을 졸업한 후 일본으로 유학, 도쿄일본 닛신여학교(日新女學敎)를 졸업했다.

일본 유학시기부터 화가 나혜석 등과 함께 자유 연애론신정조론을 외치며 개화기 신여성운동을 주도했다.[3] 일본 유학 중 문인으로 데뷔하여 시와 소설, 칼럼 등을 발표하였으며 귀국 후 1920년에는 폐허 지의 동인으로 참여하고, 1920년에는 신여성지를 직접 창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 뒤 일본 유학 중 임노월, 오오타 세이죠 등과 자유 연애를 하였다. 언론 활동으로는 1921년1931년 매일신보의 기자로 있었고, 동아일보의 기자로도 있었으며, 동아일보, 조선일보, 조선문단, 매일신보 등에 칼럼과 논설을 기고하였고, 1925년부터 3년간 아현보통학교의 교사로도 근무하였다.

나혜석, 김명순 등과 함께 여성의 성 해방론과 자유 연애론을 주장하고, 여성의 의식 계몽을 주장하는 글과 강연, 자유 연애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결혼에 두 번 실패하였으며, 사회의 편견에 시달리다가 1933년 출가, 충남 예산 수덕사에서 승려가 되었다. 이후 만공의 권고로 문필 활동을 중단하다가 1960년대 '청춘을 불사르고' 등과 수필집들을 발표하였으며, 불교 사회 운동을 하였다. 일엽은 본래 필명이었다가 승려가 된 후 법명으로도 사용하였다. 불명(佛名)은 하엽(荷葉), 도호(道號)는 백련도엽(白蓮道葉), 하엽당(荷葉堂), 본명은 김원주(金元周), 다른 이름은 원주(源珠)이다

본격적으로 산에 오르기전 단체사진촬영. 아내는 발목이상으로 차에서 대기중.

 

지난날까지 장마비가 내려 깨끗한 산이 인상적이었다.

 

수덕사찰입구.
커다란 소나무가 인상적으로 서있다.

예산 수덕사 대웅전(禮山 修德寺 大雄殿)은 충청남도 예산군, 수덕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불전이다. 1962년 12월 20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49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3칸, 측면 4칸으로 구성된 맞배집이며, 공포는 2출목으로 되어 있고 대체적으로 부석사 무량수전과 같은 형식이나, 초방(草枋) 위에 주심(柱心)도리를 지탱하는 우미량(樑)이 무량수전의 직선적인 것과는 달리 심한 곡선으로 변했고, 또 내반(內反)된 소슬, 장식적인 대공, 쇠혀처럼 뻗은 두공(頭工)의 끝 등 전반적으로 무량수전에 비해 고려 후기의 성격을 나타낸다. 1940년에 수리했을 당시 나온 묵서명(墨書銘)에 의하여 그 건물의 건축년대가 1308년임이 확인되었다.

 

 

 

우린 정상을 향하여 계속 전진.
덥지는 않았지만 간밤에 내린 비때문에 몸이 끕끕하다.

1차목적지 만공탑.
오래전 가족끼리 왔을때도 이곳까지 온 기억이 난다.

예산 수덕사 만공탑」은 만공스님(1871~1946)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1947년에 세운 석탑으로 전통적 승탑 형식을 탈피한 근대적 기념탑이다. 육각의 지대석 위에 원형의 괴임돌을 놓고, 그 위에 세 개의 기둥을 평면 Y字형태로 세운 후, 그 위에 구체(球體)를 올려놓았다. 기둥 세면의 빈 공간에 오석(烏石)으로 면석을 조성한 후, 정면에는 ‘만공탑’, 좌우측면에는 ‘世界一花’(세계일화), ‘百艸是佛母’(백초시불모)를 비롯한 만공스님의 친필과 행장(行狀), 법훈(法訓) 등을 새겼다. 탑 주위에 두른 육각의 돌난간은 후대에 만공탑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만공탑은 일제강점기 왜색불교를 타파하고 한국불교의 자주성과 정통성을 수호하기 위한 만공스님의 사상과 불교 교리를 상징적으로 구현해 내고 있고, 각 부재의 구성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어 근대기 사찰 조형물로 가치가 높다.

이곳에서 커플끼리 기념사진을 찍고~~~
이준호, 원종순내외.

김종성, 류제랑내외

 

신용주, 양혁숙내외.

 

오왕진, 성경희내외.

 

나와 최길석씨도 함께..
최근형씨는 사진찍느라 제각각이어서 찾을수가 없다.

나는 운전을 위하여 이곳에서 하산하고 다른사람들은 정상을 향하여 올라갔지만 역시 중도 하산.
나이는 속일수가 없노라.
더 젊었을때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야 겠다.

아련히 보이는 암자가 멋스럽다.

 

수덕사 경내옆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는 동전이 올려져 있고...

 

 

 

 

하산하는 길에서.

 

 

 

 

이응로화백이 말년에 작품활동을 했던 수덕여관.

 

수덕여관은 수덕사 입구 왼편에 자리잡고 있다.

 

지금부터 수덕여관과 세 여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첫번째 여인 ; 수덕여관의 주인이자 화가 이응로의 아내 박귀희

1944년 남편인 고암 이응로 화백이 이 여관을 사들이면서 여관의 운영을 이 화가의 부인인 박귀희씨가 맡게 되었다.

하지만 이응로 화백은 어린제자와 눈이 맞아 부인을 수덕여관에 남겨둔 채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남편과 이혼 후, 박귀희는 혼자 여관을 운영하게 된다.
하지만 운명은 이 여인에게 슬픈 역사로 돌아온다. 동백림 사건으로 남편 이응로가 옥고를 치르고 몸을 추스르기 위해 수덕여관으로 돌아온다.
옥바라지와 이응로를 돌본것이 조강지처였던 박귀희였다. 그러나, 이응로는 몸이 회복되자 다시 파리로 돌아가 버린다.
수덕여관에 머물면서 이응로가 바위에 암각화를 새긴 작품이 마당 한 켠에 아직도 남아있다.
이응로가 떠나 버린 후에도 박귀희는 이곳 수덕여관을 지키며 살다가 2001년에 숨을 거둔다

두번째 여인 ; 일엽스님

본명이 김완주인 일엽스님은 수덕사의 여승이었다.
일엽이라는 이름은 일본 유학시절 이광수가 지어준 이름이었다.
일엽스님이 출가하여 이곳 수덕사에 머물때 출가전 낳은 열네살 딸이 엄마 품이 그리워 일엽스님을 찾아오면 이곳 수덕여관에서 일엽스님과 딸은 상봉하여 모녀의 정을 나누었다고 한다.

이때 일엽스님의 친구인 나혜석이 딸을 보살펴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번째 여인 ; 불꽃여자 나혜석

김일엽과 동갑내기인 나혜석은 우리나라 근대사의 신여성의 대표격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인 나혜석은 이혼한 뒤 친구인 일엽스님이 있는 수덕사의 이 여관에서 머물렀다
상류층 집안에서 태어나 천재적인 예술성과 외모를 겸비한 나혜석은 당시 가부장적인 한국사회에서 여성들의 사회활동에 선구자 역할을 해왔다

그런 그녀가 이혼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 수덕여관을 찾았고 출가하기를 원했으나 스님이 되지는 못하였다.

수덕여관에 얽힌 세여인의 슬픈 이야기를 안고 있는 수덕여관.
지금은 주인도 없고 모습도 그때와 다른 모습이지만 다시금 이곳을 찾게 된다면 이곳에 한이 되어 머물고 있을 세 여인의 슬픔을 위로하고 와야 겠다.

이처럼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수덕여관은 현재 보수중.

 

 

 

이곳 수덕교가 수덕여관으로 들어가는 곳이다.

 

 

수덕여관아래에는 박물관이 지어져 있었는데 시간상 구경은 다음기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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