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고택, 백제문화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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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7.19토요일

새싹동우회 등산하는 날이다.

당초 홍성 용봉산을 택하였으나 무더운 여름임을 감안하여 덕숭산으로 장소를 변경하였다.

회원가운데 류록형씨를 제외한 14명이 참석.

대전에서 10명이 승합차를 타고, 오왕진내외는 도청이 근무처인지라 홍성에서 출발,

수원의 김종성씨도 자택에서 출발하여 오전 10시 수덕사경내 주차장에서 합류하기로 하였다.

대전에서 2시간을 계획하였으나 1시간 20분정도 걸리는것으로 나와 대전출발팀은 추사 김정희고택을 먼저 방문하였다.
사진은 추사고택 입구의 우물가.

이곳이 추사 고택 입구에서 바라본 풍경.
이 집은 영조대왕이 딸에게 하사한 집인데 그 동주의 손자가 추사 김정희선생이란다.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년)는 18세기 말에 태어나서 19세기 외척 세도 정치기에 활동한 조선 예원의 마지막 불꽃 같은 존재이다. 조선이 고유 문화를 꽃피운 진경시대의 세계화에 성공한 예술가일 뿐만 아니라, 진경시대의 학문 조류인 북학 사상을 본궤도에 진입시킴으로써 조선 사회의 변화 논리에 힘을 실어준 장본인이다.

그는 영조가 지극히 사랑한 화순옹주(和順翁主)와 김한신(金漢藎)의 증손자이다. 왕실의 내척(內戚)으로서 태어날 때부터 경축 분위기에 싸여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신비스러운 탄생 설화도 갖고 있다. 아버지 노경(魯敬)과 어머니 기계 유씨 사이의 장남으로 24개월 만에 출생했는데, 그가 태어난 향저(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의 뒤뜰에 있는 우물물이 말라버리고 뒷산인 오석산의 원맥 팔봉산의 초목이 모두 시들었다가 그가 태어나자 샘물이 다시 솟고 초목이 생기를 되찾았다고 한다. 그가 어린 시절 서울 집 대문에 써 붙인 입춘첩의 글씨를 우연히 보게 된 재상 채제공(蔡濟恭)이 그의 아버지에게 충고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 아이는 글씨로서 대성하겠으나 그 길로 가면 인생 행로가 몹시 험할 것이니 다른 길을 선택하게 하시오.”

천재성이 그의 인생에 빛과 그림자를 아울러 드리우고 있음을 노재상이 알아본 것이다. 그가 살다간 19세기 조선 사회는 18세기의 진경문화에서 벗어나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조선 문화의 보편성으로 흡수해야 하는 전환기에 직면해 있었기 때문이다

국보 제180호. 종이 바탕에 수묵. 세로 23cm, 가로 61.2cm. 손창근 소장. 조선 말기를 풍미했던 김정희의 문인화 이념의 최고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제자인 역관 이상적(李尙迪)의 변함없는 의리를 날씨가 추워진 뒤 제일 늦게 낙엽지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지조에 비유하여 1844년 제주도 유배지에서 답례로 그려준 것이다. 그림 끝에 작화(作畵) 경위를 담은 작가 자신의 발문(跋文)과 청대(淸代) 16명사들의 찬시가 적혀 있고, 이어 뒷날 이 그림을 본 김정희의 문하생 김석준(金奭準)의 찬문과 오세창(吳世昌)·이시영(李始榮)의 배관기 등이 함께 붙어 긴 두루마리를 이루고 있다. 옆으로 긴 화면에는 오른쪽에 '세한도'라는 제목과 '우선시상'(藕船是賞 : 우선 이상적에게 이것을 줌)·'완당'이라는 관서(款書)를 쓰고, '정희'와 '완당'이라는 도인을 찍었다. 그림 자체는 단색조의 수묵과 마른 붓질의 필획만으로 이루어졌으며, 소재와 구도도 지극히 간략하게 다루어졌다. 이와 같이 극도로 생략되고 절제된 화면은 직업화가들의 인위적인 기술과 허식적인 기교주의와는 반대되는 문인화의 특징으로 작가의 농축된 내면세계의 문기(文氣)와 서화일치(書畵一致)의 극치를 보여준다.

 

오른쪽이 사랑채. 왼편이 안채의 모습이다.

 

안채뒷편에 김정희의 영정이 있는데 그곳으로 가는 길.

 

 

추사 고택에 있는 은행나무에 열매가 주렁열렸다.

 

 

능소화.
진안 마이산에 능소화가 아름답다는데 8월엔 그쪽으로 발길을 옮겨봐야 겠다.

 

이준호씨와 최길석씨가 김정희 묘소를 배경으로..

 

 

이곳사진부터는 백제문화단지 사진이다.

수덕사 등반후 점심식사후 들른곳은 부여 백제문화단지.
5~6년전 백제를 알리기 위해 8,000억원을 들여 만들어진 단지이다.

 

점심후의 나른함때문인지 여자회원은 차에서 이야기 공부중.

 

어좌.

 

 

목간.
문자를 기록하기 위해 나무를 일정한 크기로 깍아만든것인데 종이가 보급되기전에 사용하였다고 한다.

 

만들어진 궁전 규모가 상당하다.
영화및 드라마 세트장으로도 널리 활용하고 있단다.

 

 

당초 연꽃이 만발한 궁남지도 들를 계획이었지만 사람이 많을듯하여 궁남지는 생략.
이 사진은 문화단지 내에있는 연못에서.

 

 

 

모처럼 동우회 야외행사를 마치고 귀가하는 길.
나이가 나이니많치 더 자주 야외행사를 가져야 겠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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