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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생각

13의 원리

 

양(洋)의 동서를 막론하고 사람이 사는 곳에는 꼭 미신이라는 게 있는 것 같다.

미신의 종류도 여러 가지여서 애교있는것이 있는가 하면 어떤 미신들은 심각한 내용을 지니고있어일상생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기까지 한다.

   예컨대 우리 나라 사람들이 숫자의 4를 싫어하는 따위는 후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4자를 싫어하는 이유가 그 발음이 죽음을 뜻하는 한자의 그것과 같은데서 비롯된 것이고보면,엄격한 의미에서 볼 때 이것을 미신이라고 해야 옳을지 의심스럽기는 하다.  그릇된 믿음이라기보다는 이 발음이 갖는 발음의 다른 뜻을 연상케 하므로 그저 피하고 싶다는 것이라면 구태어미신이라 하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이와 비슷하면서도 확실히 미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서양에서의 “13”이란 숫자의 경우이다. 소위 치명수라고 하는 이 “13”은 그 유래가 기독교의 역사에 있다는 것을알게될때 우리로서는 정말 무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미신 자체를 논의하려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 아니므로 길게 말하지는 않겠지만, 13을 죽음의 수라고 하여 이것을 기피하는 일부 서양 사람들의 태도는 그야말로 미신적이다.

   그런데 필자는 여기에 한 우연한 사실을 발견하였다. 죽음의 수라고 하는 이 13이 기독교의 진수라고 불리는 사상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하는데, 이 사랑을 파헤쳐 설명한 성경 부분이 고린도전서13장이요, 또 그 중에서도 “사랑이 제일이라”고 끝을 맺은 절수가 13절이다. 또한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은 목사님께서 축도로 축복기도하는 내용이다.  물론 이것이 어디까지나 우연한 일이기는 하지만 재미있지 않은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이란 “나를 죽이고”이웃을 살리는 희생정신에서 찾아볼 수 있다면 “13”의 원리가 바로 사랑의 정신과 상통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바울 사도는 날마다 한번씩 자기를 죽인다고 말씀했고,  예수께서는 자기를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시면서 자기희생이 바로 사는 길임을 가르치셨다. 남이 싫어하는 “13”을 내것으로 하여 날마다“나”를 죽이는 생활이 곧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생활과 직결된다. 한자의 사랑“愛”자가 13획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도 재미있는 우연이다.

   어떤 사람이 평생에 처음으로 교도소를 구경하고 있었다. 소장의 안내를 받아 그는 교도소의 모든 시설을 다 돌아보고, 이제 마지막으로 가장 관심이 쏠리는 감방을 보러 가는 참이었다. 복도를 걸어가던 그가 소장에게 물었다.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감방에 들어있읍니까?” 그 물음에 소장은 대답하였다. “아, 우리하고 똑 같은 사람들입니다. 다만 그들에게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은 잡혔고 우리는 안 잡혔다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하나님 앞에 모두 똑 같은 죄인입니다. 내가 남보다 나을게 무엇인가?

우리 같은 죄인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신 예수는 13의 원리를 최고도로 실천하신 분이다. 그를 목표로 따르고자 하는 사람이면 무엇보다 나를 죽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사랑의 구현이라고 확신한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