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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으로간 중국보물

[뉴스 클립] Special Knowledge <180> 대만으로 간 중국 보물
장제스 “어떤 대가 치르더라도” … 포화 속 황실 보물의 16년 피란길
 
 
 
대한민국 국보에 붙은 번호에는 특별한 의미가 없다. 지정된 순서에 불과하다. 중국에는 한국과 같이 번호를 매긴 국보 목록은 없다. “타이베이에는 유물은 있지만 고궁이 없고(有寶無館), 베이징에는 고궁은 있어도 유물이 없다(有館無寶)”는 말이 있다. 사실 베이징 고궁박물원에도 960만 점의 보물이 있다. 그럼에도 대만 고궁박물원 소장품을 더 높게 친다. ‘천하제일가(天下第一家)’ 중국 황실의 진귀한 보물은 대만에 몰려 있기 때문이다. 그 중국 황실 보물들의 험난했던 피난기를 소개한다.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xiaokang@joongang.co.kr>

최고의 문화재 컬렉터, 중국 황실

‘하늘 아래 왕의 땅이 아닌 곳이 없고, 땅 위 사람 중 왕의 신하가 아닌 사람이 없다(普天之下 莫非王土 率土之濱 莫非王臣)’는 왕토사상을 신봉하던 중국 황실은 최고의 문화재 컬렉터였다. 왕조가 바뀌면 새로 들어선 황실이 전 왕조의 모든 문물을 취했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淸)이 망했지만 군벌이 집권하면서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는 여전히 자금성에서 지낼 수 있었다. 24년 국민혁명이 성공하자 푸이는 그제서야 자금성에서 쫓겨났다. 청실선후위원회(淸室善後委員會)가 자금성에 들어가 황실 국보들을 정비했다. 25년 10월 10일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이 문을 열었다. 황실의 진귀한 보물들이 처음으로 일반 백성들에게 공개됐다.

중일전쟁 발발하자 ‘보물 열차’ 난징으로

 
  고궁박물관 유물들이 일본군의 폭격을 피해 1937년 쓰촨의 촨샤(川峽)도로를 힘들게 통과하고 있다. [중앙포토]
 
31년 일본 관동군이 9·18사변을 일으키고 만주를 점령했다. 국민정부는 긴박해졌다. 시급히 국보급 문화재들을 상자에 포장했다. 사상 최대 규모의 문화재 피난 작전이 시작됐다. 우선 33년 2월 6일 황실 문화재 컬렉션 2000여 상자를 실은 18량의 보물열차가 베이핑(北平, 현재의 베이징) 서역을 출발했다. 열차 지붕에는 기관총 진지가 설치돼 사주경계를 맡았다. 보물을 실은 화물칸에는 중무장한 헌병이 탑승했다. 베이핑을 떠난 열차는 톈진(天津)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피해 핑한(平漢, 베이핑-한커우), 룽하이(隴海, 시안-쑤저우)선으로 우회했다. 다시 진푸(津浦)선에 진입한 보물열차는 드디어 장쑤(江蘇)성 푸커우(浦口)에 도착했다. 적당한 보관장소를 찾지 못한 보물들은 한 달 동안 열차 안에 머물다가 상하이로 옮겨졌다. 황실 문물 남녘 이동 작전은 이후 네 차례 더 이어졌다. 당시 총 다섯 차례에 걸쳐 상하이로 옮겨진 보물은 1만9557상자였다. 4년간 상하이 두 곳에 나뉘어 보관되던 보물들은 36년 11월 난징(南京) 차오톈궁(朝天宮)에 창고가 완성되자 그곳으로 옮겨졌다. 37년 1월 고궁박물원 난징분원이 정식으로 성립됐다. 그해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해 일본군이 상하이를 점령했다. 난징도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해졌다. 보물들은 다시 정처 없는 방랑을 준비했다.

일본군 상하이 점령에 2차 이동 작전

 
  한(漢)대 청백옥(靑白玉)을 조각해 만든 벽사(辟邪). 벽사는 요괴나 사악한 것을 물리친다는 신화 속의 동물이다. 가슴까지 내려오는 턱수염과 바닥에 내려뜨린 긴 꼬리 모습이 비범하다. 받침대에는 청나라 건륭 황제의 노리개라고 새겨져 있다.
 
당시 국민당 정부는 충칭(重慶) 천도를 결정했다. 이와 함께 2차 국보 피난 작전이 진행됐다. 남·중·북 3개 경로를 따라 옮겨졌다. 37년 8월 우선 남로(南路) 팀이 출발했다. 한 점 한 점 값을 따질 수 없는 1급 국보 60상자를 실은 배 ‘젠궈(建國)함’이 난징을 떠나 창장(長江)을 따라 거슬러 올라갔다. 한커우(漢口)에 도착한 뒤 트럭에 옮겨진 보물상자들은 창사(長沙)의 후난(湖南)대학 도서관 지하실에 둥지를 틀었다. 일본 군함들도 창장을 따라 올라왔다. 급박해진 행정원은 구이저우(貴州) 안순(安順)으로 보물을 이동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얼마 후 후난대학 도서관이 폭격받았다. 트럭에 실린 보물들이 출발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두 번째 중로(中路) 팀은 규모가 컸다. 보물 9369상자였다. 37년 11월에 영국상선 ‘황푸(黃埔)함’에 실려 난징을 탈출했다. 창장을 거슬러 올라간 보물들은 한커우를 거쳐 38년 5월에야 충칭에 안착했다. 충칭에서 문화재들은 스위스 국적의 앤더슨 양행 창고 등 3곳에 나눠 보관됐다. 곧 일본군의 공습이 충칭까지 이어졌다. 39년 5월 이를 피해 다시 서쪽 쓰촨(四川)성 러산(樂山)으로 옮겼다. 이곳에서 일본과의 기나긴 전쟁이 끝날 때까지 6년을 기다려야만 했다.

세 번째 북로(北路) 팀은 상자 7286개의 운반을 맡았다. 하지만 난징에서 화물선 확보에 실패했다. 배 대신 기차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난징에서 시안(西安)을 거쳐 산시(陝西) 바오지(寶鷄)에 도착했다. 여기서 철로가 끊겼다. 운송용 차량 300대가 필요했다. 군용트럭까지 모두 징발한 뒤에야 가까스로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 2900여 상자는 난징에 남겨두고 올 수밖에 없었다.

1945년 8월 전쟁이 끝났다. 안순, 러산, 어메이에 나눠져 있던 보물들을 충칭으로 한데 모았다. 12월 9일 보물들이 난징 차오톈궁에 돌아왔다. 48년 봄 종전 후 첫 문물전시회가 열렸다. 10만이 넘는 사람들이 전란을 헤쳐낸 신비한 국보들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국공내전 격화하자 “대만으로 보내라”

 
  명(明)대 보석홍 승모 모양 주전자(寶石紅僧帽壺). 3단으로 높아지는 주전자 주둥이 부분이 승려가 쓰는 모자와 비슷하다.
 
항일전쟁은 끝났지만 곧 국공내전이 격화됐다. 당초 계획했던 문물들의 베이핑 이전 계획은 취소됐다. 48년 11월 10일 당시 고궁박물원 이사회 이사장을 맡고 있던 국민정부 행정원장 웡원하오(翁文灝)의 관저에 문화재 관련 인사들이 모여 비공식 회의를 가졌다. 여기서 고궁문물과 함께 ‘중앙도서관’의 장서를 대만으로 옮긴다는 합의가 이뤄졌다. 항리우(杭立武) 당시 교육부 차관이 책임을 맡았다.

12월 21일 국민당 해군 소속의 ‘중딩(中鼎)함’이 난징 샤관(下關) 포구에 정박했다. 11년 전 똑같은 보물을, 동일한 책임자가 옮겼던 곳이었다. 중딩함의 대만 철수 소식이 알려지자 해군사령부 군속과 가족들이 피난을 가기 위해 몰려들었다. 보물들을 실을 여지가 없었다. 운송 책임자 항리우는 초초해졌다. 해군총장 구이융칭(桂永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구이융칭이 달려왔다. 다른 배를 마련해 모두 대만으로 보내주겠다고 약속하고 나서야 비로소 문물을 실을 수 있었다. 22일 고궁박물원 보물 320상자를 포함한 문물 712상자를 실은 중딩함이 대만을 향해 출발했다. 상륙정을 개조한 중딩함은 파도가 거센 한겨울의 대만해협에서 4일간 표류하다시피 한 끝에 대만 북쪽의 지룽(基隆)항에 도착했다. 지룽항은 비가 잦았다. 문물 보관에 적합하지 않았다. 대신 중부 타이중(台中)이 적당했다. 항리우의 프랑스 유학 시절 동창이 운영하던 사탕공장의 창고를 빌려 보물들을 보관했다.

보물 실은 배 선장, 반란을 일으키다

 
  서주(西周) 말기 청동기인 산씨반(散氏盤). 산국과 측국 사이의 토지분쟁 사건이 357자의 명문으로 기재돼 있다. 청나라때 발굴된 후 황제의 생일 선물로 진상됐다.
 
48년 말 2차 운송선 ‘하이후(海滬)함’이 대륙을 떠났다. 보물 3502상자가 실렸다. 송(宋)·원(元)대의 최상급 도자기를 비롯해 청동기들이 주를 이뤘다. 이번 항해는 순조로웠다. 이제 4000상자가 남았다. 3차 문화재 운송작전이 필요했다. 당시 난징은 아비규환 상태였다. 배를 구할 수 없었다. 다시 해군총장 구이융칭에게 SOS를 타전했다. 군함 ‘쿤룬(崑崙)호’가 샤관 포구에 도착하자 피난민들이 앞다퉈 오르기 시작했다. 문물을 모두 실을 수가 없었다. 해군총장이 배에 올라 피난민들을 설득하고자 했으나 대성통곡하는 남녀노소들 앞에서 차마 배에서 내리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대신 갑판, 식당, 의무실 할 것 없이 남은 공간에 모두 보물상자들을 실었다. 고궁문물 972상자를 포함해 상자 2000개가 실렸다. 고궁 문물 728상자는 포구에 남겨졌다. 1월 29일 쿤룬호가 샤관을 출발했다. 창장 하구를 떠난 쿤룬호에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남쪽으로 가야 하는 배가 북쪽을 향하고 있는 것이었다. 부선장과 승객들이 선장 추롄팡(廉方)에게 영문을 따졌다. 선장은 반란을 일으켜 문물을 공산당에게 가져가려 했다고 시인했다. 이로 인해 쿤룬호는 20여 일이 지난 2월 22일 비로소 지룽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뒤에도 계속된 작전

중국 국보들의 대륙 엑소더스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49년 10월 1일 천안문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됐지만 남부 지역은 아직 국공내전이 진행 중이었다. 14일 국민당정부는 광저우에서 충칭으로 천도했다. 어느 날 허난(河南)성정부 주석 자오쯔리(趙子立)가 문화재 이전 총책임자 항리우를 찾아왔다. 자오 주석은 허난박물관의 소장품 가운데 전란을 피해 충칭의 국립중앙대학 분교 방공호 안에 은(殷)나라 문물 69상자를 옮겨 보관하고 있다고 말했다. 항리우는 귀가 솔깃해졌다. 당시 장제스는 대만에서 충칭으로 날아와 전투를 독려하고 있었다. 이 사실은 바로 장제스에게 보고됐다. 당시 뱃길은 모두 끊기고 하늘길만 열려 있었다. 장제스는 즉시 공군총장에게 전화를 걸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 보물을 대만으로 옮기도록 명령했다. 공군총장은 즉시 수송기 306호와 233호 두 대를 수배했다. 하지만 적재함이 적어 69상자를 모두 실을 수 없었다. 그 가운데 가치가 더 나가는 38상자를 두 대에 나눠 실었다. 11월 29일 새벽 보물 21상자를 싣고 충칭을 이륙한 233호는 무사히 타이베이 쑹산(松山)비행장에 착륙했다. 17상자를 실은 306호는 이륙 후 기계고장을 일으켰다. 쿤밍에 불시착한 수송기는 다시 해남도의 하이커우를 거쳐 대만에 가까스로 도착했다.

국민당 수뇌부 마지막 탈출 비행기엔 ‘둔황 벽화’

최후의 비행은 12월 9일 청두 신진(新津)비행장에서 이뤄졌다. 국민당 수뇌부의 마지막 대륙 탈출 현장이었다. 산시(山西)의 맹주 옌시산(閻錫山)이 황금 두 상자를 막무가내로 비행기에 실었다. 비행기가 막 이륙하려는데 쓰촨 출신의 저명한 화가 장다첸(張大千)이 둔황 벽화 78점을 가지고 나타났다. 비행기 적재 중량은 이미 초과한 상태였다. 그림을 실을 공간이 없었다. 항리우가 궁리 끝에 자신의 짐을 버리며 장다첸에게 말했다. “저 안에 내 전 재산 황금 수십냥이 들어있소. 저 그림을 고궁박물원에 기부한다고 약속하시오. 그렇다면 실어주겠소.” 장다첸은 갖고 있던 명함에 동의 각서를 썼다. 5명의 국민당 고관과 1명의 화가, 황금 두 상자, 78폭의 그림을 실은 국민당 최후의 비행기는 이렇게 대륙을 이륙했다.

유물 65만점, 대만 고궁박물원에 둥지

48년 12월 21일 중딩함을 시작으로 12월 9일 청두 신진비행장을 이륙한 최후의 비행기까지 1년여에 걸친 문물 이송 작전과 일본으로부터 돌려받은 문화재까지 5606상자의 진귀한 보물들이 대만으로 옮겨졌다.

65년 11월 12일 타이베이 와이솽시(外雙溪)에 고궁박물원이 정식으로 건립되면서 임시로 보관되던 보물들은 드디어 안식처를 찾게 됐다. 대만 고궁박물원은 현재 송·원·명(明)·청(淸)대 네 왕조의 궁정 유물 24만 점을 포함해 65만 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전시공간이 부족해 평소 유물 2만 점을 진열하며 3개월마다 새롭게 전시품목을 바꿔 전시하고 있다.

참고서적: 周兵, 『台北故宮』, 金城出版社,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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