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클립] Special Knowledge <180> 대만으로 간 중국 보물
장제스 “어떤 대가 치르더라도” … 포화 속 황실 보물의 16년 피란길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xiaokang@joongang.co.kr> 최고의 문화재 컬렉터, 중국 황실 ‘하늘 아래 왕의 땅이 아닌 곳이 없고, 땅 위 사람 중 왕의 신하가 아닌 사람이 없다(普天之下 莫非王土 率土之濱 莫非王臣)’는 왕토사상을 신봉하던 중국 황실은 최고의 문화재 컬렉터였다. 왕조가 바뀌면 새로 들어선 황실이 전 왕조의 모든 문물을 취했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淸)이 망했지만 군벌이 집권하면서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는 여전히 자금성에서 지낼 수 있었다. 24년 국민혁명이 성공하자 푸이는 그제서야 자금성에서 쫓겨났다. 청실선후위원회(淸室善後委員會)가 자금성에 들어가 황실 국보들을 정비했다. 25년 10월 10일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이 문을 열었다. 황실의 진귀한 보물들이 처음으로 일반 백성들에게 공개됐다. 중일전쟁 발발하자 ‘보물 열차’ 난징으로
일본군 상하이 점령에 2차 이동 작전
두 번째 중로(中路) 팀은 규모가 컸다. 보물 9369상자였다. 37년 11월에 영국상선 ‘황푸(黃埔)함’에 실려 난징을 탈출했다. 창장을 거슬러 올라간 보물들은 한커우를 거쳐 38년 5월에야 충칭에 안착했다. 충칭에서 문화재들은 스위스 국적의 앤더슨 양행 창고 등 3곳에 나눠 보관됐다. 곧 일본군의 공습이 충칭까지 이어졌다. 39년 5월 이를 피해 다시 서쪽 쓰촨(四川)성 러산(樂山)으로 옮겼다. 이곳에서 일본과의 기나긴 전쟁이 끝날 때까지 6년을 기다려야만 했다. 세 번째 북로(北路) 팀은 상자 7286개의 운반을 맡았다. 하지만 난징에서 화물선 확보에 실패했다. 배 대신 기차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난징에서 시안(西安)을 거쳐 산시(陝西) 바오지(寶鷄)에 도착했다. 여기서 철로가 끊겼다. 운송용 차량 300대가 필요했다. 군용트럭까지 모두 징발한 뒤에야 가까스로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 2900여 상자는 난징에 남겨두고 올 수밖에 없었다. 1945년 8월 전쟁이 끝났다. 안순, 러산, 어메이에 나눠져 있던 보물들을 충칭으로 한데 모았다. 12월 9일 보물들이 난징 차오톈궁에 돌아왔다. 48년 봄 종전 후 첫 문물전시회가 열렸다. 10만이 넘는 사람들이 전란을 헤쳐낸 신비한 국보들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국공내전 격화하자 “대만으로 보내라”
12월 21일 국민당 해군 소속의 ‘중딩(中鼎)함’이 난징 샤관(下關) 포구에 정박했다. 11년 전 똑같은 보물을, 동일한 책임자가 옮겼던 곳이었다. 중딩함의 대만 철수 소식이 알려지자 해군사령부 군속과 가족들이 피난을 가기 위해 몰려들었다. 보물들을 실을 여지가 없었다. 운송 책임자 항리우는 초초해졌다. 해군총장 구이융칭(桂永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구이융칭이 달려왔다. 다른 배를 마련해 모두 대만으로 보내주겠다고 약속하고 나서야 비로소 문물을 실을 수 있었다. 22일 고궁박물원 보물 320상자를 포함한 문물 712상자를 실은 중딩함이 대만을 향해 출발했다. 상륙정을 개조한 중딩함은 파도가 거센 한겨울의 대만해협에서 4일간 표류하다시피 한 끝에 대만 북쪽의 지룽(基隆)항에 도착했다. 지룽항은 비가 잦았다. 문물 보관에 적합하지 않았다. 대신 중부 타이중(台中)이 적당했다. 항리우의 프랑스 유학 시절 동창이 운영하던 사탕공장의 창고를 빌려 보물들을 보관했다. 보물 실은 배 선장, 반란을 일으키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뒤에도 계속된 작전 중국 국보들의 대륙 엑소더스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49년 10월 1일 천안문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됐지만 남부 지역은 아직 국공내전이 진행 중이었다. 14일 국민당정부는 광저우에서 충칭으로 천도했다. 어느 날 허난(河南)성정부 주석 자오쯔리(趙子立)가 문화재 이전 총책임자 항리우를 찾아왔다. 자오 주석은 허난박물관의 소장품 가운데 전란을 피해 충칭의 국립중앙대학 분교 방공호 안에 은(殷)나라 문물 69상자를 옮겨 보관하고 있다고 말했다. 항리우는 귀가 솔깃해졌다. 당시 장제스는 대만에서 충칭으로 날아와 전투를 독려하고 있었다. 이 사실은 바로 장제스에게 보고됐다. 당시 뱃길은 모두 끊기고 하늘길만 열려 있었다. 장제스는 즉시 공군총장에게 전화를 걸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 보물을 대만으로 옮기도록 명령했다. 공군총장은 즉시 수송기 306호와 233호 두 대를 수배했다. 하지만 적재함이 적어 69상자를 모두 실을 수 없었다. 그 가운데 가치가 더 나가는 38상자를 두 대에 나눠 실었다. 11월 29일 새벽 보물 21상자를 싣고 충칭을 이륙한 233호는 무사히 타이베이 쑹산(松山)비행장에 착륙했다. 17상자를 실은 306호는 이륙 후 기계고장을 일으켰다. 쿤밍에 불시착한 수송기는 다시 해남도의 하이커우를 거쳐 대만에 가까스로 도착했다. 국민당 수뇌부 마지막 탈출 비행기엔 ‘둔황 벽화’ 최후의 비행은 12월 9일 청두 신진(新津)비행장에서 이뤄졌다. 국민당 수뇌부의 마지막 대륙 탈출 현장이었다. 산시(山西)의 맹주 옌시산(閻錫山)이 황금 두 상자를 막무가내로 비행기에 실었다. 비행기가 막 이륙하려는데 쓰촨 출신의 저명한 화가 장다첸(張大千)이 둔황 벽화 78점을 가지고 나타났다. 비행기 적재 중량은 이미 초과한 상태였다. 그림을 실을 공간이 없었다. 항리우가 궁리 끝에 자신의 짐을 버리며 장다첸에게 말했다. “저 안에 내 전 재산 황금 수십냥이 들어있소. 저 그림을 고궁박물원에 기부한다고 약속하시오. 그렇다면 실어주겠소.” 장다첸은 갖고 있던 명함에 동의 각서를 썼다. 5명의 국민당 고관과 1명의 화가, 황금 두 상자, 78폭의 그림을 실은 국민당 최후의 비행기는 이렇게 대륙을 이륙했다. 유물 65만점, 대만 고궁박물원에 둥지 48년 12월 21일 중딩함을 시작으로 12월 9일 청두 신진비행장을 이륙한 최후의 비행기까지 1년여에 걸친 문물 이송 작전과 일본으로부터 돌려받은 문화재까지 5606상자의 진귀한 보물들이 대만으로 옮겨졌다. 65년 11월 12일 타이베이 와이솽시(外雙溪)에 고궁박물원이 정식으로 건립되면서 임시로 보관되던 보물들은 드디어 안식처를 찾게 됐다. 대만 고궁박물원은 현재 송·원·명(明)·청(淸)대 네 왕조의 궁정 유물 24만 점을 포함해 65만 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전시공간이 부족해 평소 유물 2만 점을 진열하며 3개월마다 새롭게 전시품목을 바꿔 전시하고 있다. 참고서적: 周兵, 『台北故宮』, 金城出版社, 2009 </xiaokang@joongang.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