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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해외)/5. 연변, 백두산

4. 두만강(중국, 북한 경계선에서)

연변의 주도()는 연길(엔지)이다. 조선 말기부터 한국인이 이주하여 개척한 곳으로 이전에는 북간도라고 불렀다. 1952년 9월 3일에 자치구가 설립되고, 1955년 12월에 자치주로 변경되었다.
옌지[],·투먼, 둔화, 허룽, 용정, 훈춘의 6개 시와 왕칭[]·안투[] 2개 현으로 이루어져 있다. 11개 민족이 거주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조선족이 41%를 차지하며, 나머지는 한족(), 만주족, 후이족 순이다.

지린성 동부에 있으며, 헤이룽장성[]과 접한다. 창바이산맥[]과 라오예링산맥[] 경내로 뻗어 있고, 그 사이에 옌지분지가 펼쳐진다. 이 때문에 해발고도 500∼1,000m 지점이 많다. 이 산지에서 흘러 나오는 하천은 둥베이수계[]의 근원이 된다.

주요 하천으로는 투먼강·쑹화강[]·무단강[쑤이펀강[] 등이 있다. 투먼강 유역에 있는 중국의 국제개발지인 훈춘경제개발지를 '동북아 금삼각주()'라고 부른다.

기후는 대륙성 기후이나 변화가 잦고, 강수량은 산지가 많기 때문에 하천의 수량이 풍부하다. 연평균기온 2∼6℃, 1월 평균기온 -14.1℃, 7월 평균기온 21.6℃, 연평균강수량은 500∼700mm이다. 농업은 주로 곡저평지()에서 이루어지며, 쌀·콩·조 등의 곡물을 생산한다.

특히 벼농사는 한국인이 이주한 뒤에 발달하였으며, 90년의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또 잎담배는 지린성 생산량의 5분의 4를 생산하며, 그밖에 특산물인 인삼과 과일도 많이 난다.

산지에는 삼림이 우거져 중국의 중요한 임업지대를 이룬다. 투먼·둔화·다스터우[]에 3대 제재소가 있으며, 그밖의 여러 곳에서 목재공업이 이루어진다. 또 이 목재를 원료로 하는 제지공장이 투먼·스옌[]·카이산툰[] 등에 산재한다.

동부에는 각종 지하자원이 매장되어 있으며, 그 중 허룽과 훈춘의 석탄, 왕칭의 오일셰일(유혈암), 톈바오산[]의 구리·납, 훈춘의 금 채굴이 손꼽힌다. 공업으로는 농업기계·철강·정유·전자 분야의 발전이 두드러지며, 공장은 옌지 등의 시 지역에 분포한다.

교통은 창춘[]·지린·투먼을 잇는 창투철도[]가 지역안을 동서로 가로지르고, 옌지에서 허룽과 카이산툰으로 지선()이 분기한다. 또 투먼에서 무단강과 함경북도 온성()으로 통하는 무투철도[]가 갈라진다. 도로는 철도를 따라 뻗어 있는데 남북으로 관통하는 도로가 발달하였다. 항공편으로는 옌지공항이 있는데, 국내선으로는 베이징·창춘·선양까지 운항하고, 국제선으로는 한국 부산까지 운항한다.

일제강점기에 이곳은 독립운동의 근거지였으므로 청산리항일전승지()·봉오동()항일전승지·일송정() 등 유적지가 많다. 그밖에 백두산 천지·정줴사[]·전샤오공주묘 []·룽후석조각[]·이커당아비[]·시구청[西]·아오둥청[]·바롄청[] 등의 고대유적이 남아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연변대학·연변의과학원·연변사범대학·연변예술학원·농업학원 등이 있다.

호텔 숙소에서 본 아침거리 풍경이다.

 

 

경도는 같은데 시차가 한국보다 1시간 늦기에 시간보다 날씨가 밝았다.

 

연길시내를 가로지르는 강이다. 한국처럼 강남, 강북으로 나뉘는데 보이는곳이 강남지역. 한국과는 달리 이곳이 구 시가지라 한다.

 

우리가 있는곳이 강북지역인데 커다란 건물도 많았지만 낡은 건물도 많았다. 이곳은 갑자기 부자가 된 사람도 많다고 한다. 시골엔 빈집이 아주 많았는데 농부들이 도시로 이주하며 생긴 빈집이라 한다. 하지만 시골집을 팔지 않는 이유는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며 그대로 둔채 도시로 이주한다고 한다.

 

 

이도백하의 숙소보다는 좋았지만 음식맛은 별다름 없었다.

 

송인선씨 아침은 역시 컵라면. 나도 먹고 싶었지만 요즘은 라면먹은 후 속이 별로 좋지 않아서.....

 

이곳 호텔에선 예식장을 겸하고 있는데 이날은 회갑잔치가 있는날인가 보다. 음식은 조촐했지만 부부 이름이 함께 쓰여있는것이 특이하다.

 

 

 

금강산으로 향하려다가 우리차량때문에 소동이 일어났다. 우리가 길 건너편으로 불법 죄회전을 하려는데 늘어진 전선이 우리차 통풍구에 걸려버렸다.

 

4차선중 중앙 2차선에 걸쳐 차가 서버렸고 우리 회원들은 걸쳐있는 줄을 제거하고 있다.

 

그런데 성질급한 중국사람들이 우리차를 피하여 가려다가 접촉사고가 났다. 공안이 이를 목격했지만 파란 점퍼를 입은 아우디차량 여성 운전자가 지갑을 꺼내 흥정하자 그냥 가버린다. 중국에선 공안이 나서면 더 복잡한 일이 많기에 당사자들이 알아서 해결 하라고 한단다.

 

여인은 돈을 주고 사고현장에서 빠져나오려는데 트럭운전자는 불만이다. 잠시후 합의를 한 운전자는 부서진 부품을 차에 실었다.

 

그러던중 이 일대는 큰 교통혼잡이 있었다. 사진엔 많은차가 보이지 않지만 한차로는 사고차량, 우리차가 2개차로에 걸쳐있기에 나머지 한개차로로 양방향 차량들이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양보는 전혀 없이 머리를 먼저 들이민 차가 우선이었다.

 

우리차가 건너가도록 조금만 양보하면 차가 쉽게 소통될텐데 꼼짝하지 않고 양보도 안한다. 몇차례 부딪힐 위기를 넘기고 우리차가 간신히 중앙선을 불법으로 넘어 건너편으로 간 후 겨우 차선이 열렸다. 신기한것은 그렇게 앞다투어 나가려고 용을 쓰면서도 클락션 누르는 차는 하나도 없었다는것. 이곳역시 중국사람만의 무질서속에 질서를 가지고 있는것 같다.

 

물론 중국 상해나 북경등에선 교통법규가 잘 지켜지지만 이처럼 변두리에서는 중앙선도 없고 앞지르는차가 우선이었다. 상대편차량이 중앙선을 침범해 자기 앞으로 와도 클락션을 울리진 않았다. 다만 내가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릴때만 클락션을 울리고 있었다.

 

 

하지만 신호등은 철저히 지켜지고 있었다. 속도측정기 앞에서도 규정속도는 철저히 지켰다. 예전에는 없었지만 최근엔 신호등과 속도측정기인근에 카메라가 설치되어서 라고 한다. 우리나라처럼 네비게이션은 아직 볼 수 없었다.

 

연길시내 거리 모습.

 

 

이곳 연변병원은 연변자치지구에서 최고의 시설을 자랑하고 있다고 한다. 병원 규모도 상당했다.

 

병원 옆엔 의과대학이 자리잡고 있다.

 

시계가 있는 건물이 시체 해부실이라 한다. 우리나라에선 기증받은 시체가 해부용으로 이용되는데 사형제도가 있는 이곳에선 사형수의 가족 동의를 얻고 사형수를 해부용으로 많이 이용한다고 한다.

 

원 할머니 보쌈집도 있다. 이곳 연변은 북한과의 통행이 많은 곳이지만 문물은 우리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는것 같았다.

 

어제 저녁을 하였던 청와대.

 

오늘 우리 일정은 중국, 북한의 국경지대 도문. 물론 압록강, 두만강을 낀 모든곳이 국경지대지만 도문에서는 지척에 북한땅을 볼 수 있는곳이다.

 

 

 

 

이곳은 북한지역과 지척에 있기에 많은 탈북자가 많았다고 한다. 이 건물은 탈북자 수용소. 현재는 탈북자를 거의 볼수가 없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가이드 역시 한국이란말대신 조선이란 말을 즐겨쓰고 내색은 안했지만 북한의 입장을 선호하는듯 하였다.

 

도문시내이다. 연변보다는 많이 작은 도시였다.

 

 

 

건너편에 보이는 산이 북한지역이다.

 

김정구선생의 눈물젖은 두만강. 두만강 푸른물에 노젓는 뱃사공. 하지만 두만강은 예전 두만강이 아니었다. 상류지역에 광산(?)등으로 인하여 흙탕물만 흐르고 있었다.

 

이곳에서 뗏목(?)을 타고 두만강 유람에 나섰다. 두만강 넓이는 생각보다 좁았다.

 

폭은 넓고 좁은곳이 있겠지만 우리가 땟목을 탖 이곳은 30여 미터의 폭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북한이 나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강의 상당 폭은 북한지역이었고 위에 보이는 육지는 북한지역이었다.

 

 

비록 땟목을 타고 있었지만 강 자체가 북한지역의 강이기에 우린 북한 지역에서 물을 가르고 있는것이다.

 

역시 북한 땅이다.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월경을 할수 있는 거리다. 더구나 겨울에 강이 얼었을 경우에는.....

 

땟목은 최근 만들어진듯 깨끗하였다. 30분 유람하는데 10,000원을 받았다.

 

북한군 초소이다. 사람들이 초소에서 이곳을 바라보고 있다. 성수기엔 아이들까지 이곳에 나서서 관광객들에게 구걸을 한단다. 물론 얻어진 돈들은 북한군에게 빼앗기지만. 지금은 비수기여서 군인둘과 민간인(?) 한명만 보았을 뿐이었다.

 

민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주변을 정리하는 모습이 보였다. 성수기땐 북한의 여성들도 나와서 이야기를 주고 받기도 한다고 한다.

 

북한땅과 멀리보이는 산의 진달래. 김소월의 시 진달래에도 나와 있지만 이곳 북방엔 진달래가 많이 피고 있는가 보다.

 

땟목이 가는곳은 이곳까지 멀리 보이는것은 철교이고 일행이 타고가는 위쪽은 인도이다.

 

중국쪽의 국경수비대.

 

땟목이 10인승이어서 우리는 두대에 나누어 탓다.

 

인도교의 국경지역. 회색지역이 북한, 분홍색지역이 중국땅이다.

 

우리가 사진촬영하고 유람한 강가는 북한지역이다. 육로로는 안되지만 유람선으로 왕래하는건 허용했다고 한다.

 

 

 

 

 

 

 

 

 

 

 

 

땟목유람을 마치고 북한지역을 향하여 기념촬영.

 

 

 

서정은씨가 다른배에 타려고 건너가고 최길석씨가 타려는데 배가 출발하여 둘은 잠시 이산가족이 되었었다. 정박한 땟목에서 기념촬영.

 

오왕진씨가 동동주와 간식을 샀기에 난 술 안먹는 사람을 위하여 감주를 샀다. 우리는 지금의 식혜를 옛날엔 감주라 불렀기에 그러한 음료인줄 알았더니 술주(酒)자 감주였다.

 

 

 

화장실도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이곳사람들은 화려한것을 좋아하는듯. 어디서나 붉은 장식들이 많았다.

 

 

 

 

 

 

 

땟목을 탄후 옆에 있는 국경수비대쪽으로 자리를 이동하였다. 이곳이 북한지역으로 가는 인도이다. 몇년전 김정일이 중국을 다녀갔을때 중국에 갈때는 압록강지역의 단동으로 다시 북한으로 갔을때는 이곳 도문을 이용했다고 한다. 물론 이 다리가 아니고 바로 옆에 있는 철길을 이용한 귀국.

 

 

북한과의 접경지내. 철판 중앙의 붉은선이 접경선이다. 중국의 안내원이 계속 근접하며 월경하는지를 감시하고 있었다.

 

 

 

 

 

지척에 두고도 갈 수 없는땅. 그렇기때문에 서울에서 연변가는 비행항로도 중국으로 돌아 가야만 한다.

 

중국방면을 배경으로 자유롭게 한장.

 

망루를 오르려 했는데 수리중이라서 못 올라간단다.

 

이곳은 북한, 중국을 이어주는 철교이다. 김정일이 이곳을 이용하여 중국을 다녀왔던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