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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해외)/5. 연변, 백두산

1. 연길, 이도백하

약 40여년전 새싹문화회란 단체(?)가 있었다. 현재의 한밭도서관 관장이었던 림선묵씨가 젊은이들을 모아 3개월간 일본어를 가르키면서 일본을 바로알고 봉사정신을 심어주기 위해 만든 단체이다.
이 모임을 통해 알게된 친구들이 친목모임을 만든것이 "새싹동우회"

금년이 31년이 되는 해이다. 현재는 8명의 회원이 부부동반으로 모이며 끈끈한 정을 이어가고 있다.

그간 국내및 해외여행을 계획했지만 다양한 직업때문에 시간 맞추기가 어려웠지만 안식구들을 제주도 여행을 보내기도
하고 부산, 울릉도여행을 다녀오기도 하였다. 
사실 창립 30주년인 작년에 해외여행을 계획했다가 실행을 하지 못하고 2011년 해외여행을 계획하였다.
전체 회원의 참석을 바랬지만 류록형씨가족이 참석못하고 김종성씨는 교사는 학기중 해외여행을 못한다는 규정때문에
13명이 백두산 여행을 하였다.

마침 이준호씨가 자주 애용하던 미주항공사를 통하여 성수기임에도 저렴한 가격에 중국을 다녀올 수 있었다.  
여행일자는 징검다리 연휴가 있는 5월 5일(목) ~ 8일(주일). 장소는 백두산, 연변, 용정으로 하였다.

함께간 회원 13명중 여자회원 7명은 1명을 제외하곤 해외여행 경험이 있었지만 남자회원은 3명만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9시 40분 비행기를 타기 위하여 5월 5일 새벽 3시 30분 병무청앞에서 모여 인천공항으로 향하였다. 미주항공사 이동철 사장도 이준호씨와의 친분으로 공항까지 동행하며 여행수속을 직접 해 주었다.

 

수속을 마친후 2시간이 넘게 시간이 남아 지하철역 방향에 있는 작은 식물원을 구경하였다. 우편에서 두번째 류제랑씨가 유일하게 솔로로 여행을 하였다. 남편 김종성씨는 교사인데 교사는 학기중 해외여행을 금한다는 규정을 모르고 있다가 출발 5일전에야 이사실을 알고 해약하느라 힘이들었다. 우리가 단독으로 행사를 주관했기에 환불액이 적다기에 혼자서라도 여행을 감행하였다.

 

 

 

 

공항청사 2층에 이처럼 투명 도로가 있었다. 분명 사람이 지나도록 설치가 된것 같은데 아래가 훤히 보여선지, 불안스럽기도 하여 이용하는 사람이 없었다.

 

면세점에 들러 물건을 보기도 하였다. 아침식사는 기내에서 하도록 되어 있는데 10시가 넘을것 같아 공항에서 어묵과 김밥으로 요기를 하였다.

 

공항에 걸려있는 장백폭포. 사실 백두산 여행은 6~8월이 적기라 한다. 우리는 징검다리 연휴를 이용하느라 당초엔 일본여행을 계획하였지만 백두산 가자는 이야기가 나와 방향을 백두산으로 돌렸다.

 

하지만 이곳 한국에서의 기후만 생각한 결정이었다. 출발 임박해서 5월의 백두산을 검색해보니 천지는 온통 얼음이고 눈이 1미터 넘게 쌓이기도 한단다. 하지만 설경의 백두산도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이용할 비행기는 아니아나 항공이다. 저가항공을 이용할 시 20여만원이 싸지만 30년만의 모임여행이기에 비용보다는 품격높은 여행을 하기로 하였다. 사진은 엔진을 점검하는 기술자모습.

 

우리가 이용할 48번 게이트.

 

새벽에 모이느라 모두들 잠을 설친 상태지만 이야기의 꽃은 끊임이 없다.

 

 

 

 

드디어 비행기 탑승. 앞의 부부가 회장 신용주씨. 둘다 해외여행은 처음이다. 늦게 신앙생활을 시작하여 열심을 다하고 있다.

 

 

연변까지의 비행시간은 2시간 30분. 경도상으로는 우리나라와 일치가 되는 지점이지만 중국자치구여선지 우리나라보다 1시간이 늦었다. 즉 우리나라 3시면 연변은 2시.

 

항공에서 바라본 연변. 예전 만주벌판이라 일컫는 곳이라 한다.

 

 

 

이곳 대부분은 사람과 소에 의하여 농사를 짓고 있는데 그 토지가 엄청난 규모였다.

 

 

 

 

착륙직후. 감속을 위하여 비행기 날게가 바짝 들려진다.

 

 

연길공항은 군용비행장과 함께 사용하고 있는듯 하였다. 공항로비 반대편엔 미그기가 여러대 있었고 연길에 거주하는동안 미그기의 비행을 간혹 볼 수 있었다.

 

 

이곳 연변은 조선족 자치지구 이다. 연길은 연변 자치지구의 가장큰 도시이름. 이곳 연변은 한글과 한자를 병행하여 표기하도록 되어 있다고 한다.

 

조선족이 많이 때문이라선지 한글이 먼저 표기되어 있었다.

 

연길 시내 가는길. 백두산(중국명으로 장백산)의 표식이 보인다.

 

 

점심을 먹은 식당이다. 비행기에서 식사한지 두시간도 되지 않았지만 여행을 위해서는 부지런히 먹는것도 중요한 일이다.

 

조선족 비율이 40%가 넘기 때문인지 우리나라에서 볼수 있는 음식도 나왔다. 음식 배부분이 짭짤함.

 

우리일행이 나흘간 이용한 버스이다. 기사분은 30대의 남자인데 아버지도 관광운수업을 한다고 한다. 차량이 깨끗하였고 중국 대부분의 관광차량이 그렇듯 앞 유리가 통으로 되어있어서 차창 관람이 시원하였다. 우리 팀을 위하여 인도, 차도 구분없이 장애물이 있어도 관계없이 목적지까지 다가갈 수 있는대로 차를 몰아주었다.

 

 

우리는 연길에서 백두산 인근마을인 이도백하까지 4시간 걸려 이동을 하였다. 숙소를 연길에 잡을경우 백두산 여행을 위하여 반나절을 보내야 하기에 백두산 인근지역으로 첫날 숙소를 정하였다.

 

우리나라에선 거의 볼 수 없는 철도건널목 초소이다.

 

 

이번 여행중 가장 보고 싶었던 장소이다. 불후의 가곡 선구자에 나오는 소나무. 선구자는 윤해영 작사 조두남 작곡의 우리 가곡이다. 조두남이 21세 되던 1933년 만주 牧丹江 에서 작곡한 곡이라고 한다. 조두남이 만주에서 유랑하고 있을 때 윤해영이 준시 "용정(龍井)의 노래"에 독립군의 기상을 표현하는 곡을 지어 "선구자"라고 제목을 붙였다 한다. 그 뒤 윤해영의 행적은 알 수 없지만 이 곡은 민족의 노래로 많은 사람들에게 애창되었다. 가사 중에 나오는 일송정 용정고개와 해란강은 독립투사들이 쉬어가던 곳이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한줄기 혜란강은 천년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하지만 독립운동가들의 애환이서린 소나무는 일본인들에 의하여 1938년 고사되었고 지금의 소나무는 1991년 한국인들에 의하여 다시 심어졌다고 한다. 우리 여행코스에서는 차창관광으로 되어 있는데 사진이라도 남기고 싶어 차를 잠시 세우고 사진촬영을 하였다.

 

다시 이도백하를 향하여 가는 중.

 

이곳엔 과수농가도 많았는데 사과배가 유명하다고 한다.

 

 

도로 주변에는 공익표어및 산불금지등을 알리는 글귀와 깃발을 많이 볼 수 있었다.

 

 

말로만 듣던 만주벌판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중간 휴게소의 화장실풍경. 이런곳이 낮설어서 여성회원들은 한참을 망설여야 했다.

 

이곳이 그 유명한 청산리 전투가 벌어졌던 만주벌판이란다. 1920년 10월 21∼26일,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군과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이 주축이 된 독립군 부대가 만주 허룽현[和龍縣] 청산리 백운평(白雲坪)·천수평(泉水坪)·완루구(完樓溝) 등지역에서 10여차례의 싸움을 벌여 대파한 곳이라 한다.

 

우리 독립군들의 기상을 생각하며 차는 계속 백두산 쪽으로 이동중.

 

5월초라지만 이곳 북방에는 아직도 눈이 녹지않은곳이 많았다.

 

 

사진으론 보이지 않지만 저 산 끝자락에 백두산이 있다고 한다.

 

 

 

 

이도백하에는 소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었다. 이것은 미인송군락지이다.

 

백두산나무의 벌목을 위한 철로가 여러곳 놓여 있다.

 

이도백하 시내이다. 우리의 작은 면소재지를 연상케 하는 곳.

 

 

우리일행이 하루를 머물 영욱호텔. 6~8월이 성수기이고 5월 20일경에야 본격적인 여행객들이 모여든단다.

 

 

숙소에다 짐을 풀고 인근 강원도 식당에서 저녁식사.

 

 

우리나라 6~70년대를 연상케하는 식당이었다.

 

장가계에서처럼 음식에 향료가 많이않아 먹는데 큰 부담은 없었다.

 

이곳역시 음식이 간간하였다. 된장찌게도 나왔지만 먹기에는 조금 부담스러웠다. 가정마다 약간의 반찬을 준비했지만 그냥 현지식을 먹을수 있었다.

 

그냥 숙소에 들어가기가 아쉬워 가이드를 통해 양꼬치집을 찾았다.

 

가이드에게 알아서 음식을 시켜달라하였는데 너무 많은 꼬치를 시켰다. 방금 저녁을 먹었는데.... 벌써 주문이 들어갔다면서 꼬치가 계속 나오는 바람에 난감했다. 음식값 14만원지급. 첫날부터 폭리를 당했다는 생각에 가이드에게 별도로 주려던 팁은 생략.(사실 팁은 여행경비에 포함되었는데 안내 잘 해달라는 의미로 별도로 주려 했는데...)

 

연변 숙소에 있는 화장지와 우리나라 화장지. 작기도 하였지만 부드러운 맛이 없었다.

 

투숙객이 많지 않아선지 중앙공급이 아닌 개별 축열기가 있어서 온수를 사용하도록 하였다. 이곳지역은 열악한 환경탓에 녹물도 나오기도 하고 온수가 시간제로 나오는 곳도 있다는데 우리가 묵은 호텔(우리나라 여관수준)은 그래도 좋은 편이었다.

 

차 문화의 나라기에 숙소바다 커피포트와 차가 놓여 있었다. 일회커피믹스는 두개에 5元(약 850원). 성지순례시 커피포드를 가져가 애용하였기에 이번여행에도 가져갔는데 중국의 차문화덕에 숙소마다 커피포드가 놓여 잇었다.

 

 

온냉겸용 벽걸이 온풍기가 있었는데 밤새 추워서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