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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국내)/여행(대전)

연평해전 용사들 잠든곳을 가다.

1995년 6월 29일 그날은 삼풍백화점이 붕괴되었던 날이었다.

당시 백운교회에서 실시한 교사강습회 가는중 라디오에서 비보를 접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7년후인 2002년 6월 29일.

월드컵 3,4위전이 열리던 날 서해 연평도에서는 우리해군 참수리 357호와 적 함대의 교전이 있었던 날.

그날 있었던 전투를 영화화한 "연평해전"이 극장가를 달구고 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전투의 순간에도 흔들림 없이 나라를 지키려 했던 정장 ‘윤영하’ 소령을 비롯하여 헌신적인 조타장 ‘한상국’ 상사, 따뜻한 배려심을 지닌 의무병 ‘박동혁’ 병장까지, 군인이기 전에 우리의 아들, 친구, 가족이었던 그들의 이야기는 애틋한 마음을 더해준다.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온 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내와 행복한 미래를 꿈꾸고, 홀로 계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모습은 마음속 깊은 공감과 함께 울림을 전해준다. 여기에 긴박한 해전 상황 속에서도 서로를 의지하며 끈끈한 전우애를 보여줬던 대원들의 이야기는 한층 더 뭉클한 감동을 선사한다.

 

당시 병무청에 근무했던 필자는 연평해전 후 해병대 자원자가 몰려들었던것을 기억한다.

지금 영화상영관에도 20대 관객이 최다라는 것을 보고 우리 젊은이들의 또다른 모습을 본다.

병무청 근무시 안보현장 견학의 차원으로 평택2함대를 방문했었다. 천안함과 연평해전 전승비를 볼수 있었다. 전승비는 당시 적함과의 교전을 형상화한 조각.

 

참수리 357호의 전사자 6명. 전사가 아닌 순직으로 처리하여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정치인들이 연평해전 영화 개봉에 즈음하여 전사처리 해주기로 하였다는 기사가 보였다.

 

 

해군병사가 연평해전 상황을 이야기 해주고 있는 장면.

 

함께했던 직원 박선규씨와.

 

전승비 아랫쪽에 당시 침몰했던 357함정이 보인다. 적이 먼저 발포하기전에는 사격하지 말라는 교전규칙때문에 선제공격을 당해 아군의 피해가 컷던것. 물론 북한군도 배가 침몰하는등 피해가 컷지만 이후 교전규칙이 바뀌었다고 한다.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때문에 크게 이슈화되지는 못하였던 현장.

 

배 사방에 수없이 난 총탄자욱이 그날의 참상을 말해주고 있다.

 

대전 국립현충원에 연평해전 용사의 묘소가 있다. 현충원은 자주 가지만 이들의 묘소를 찾아보진 못하였기에 새벽기도회 마친 후 현충원으로 향하였다.

 

이들 묘소를 알리는 표지판. 천안함사건 이후에 세워진 표지판이다.

 

이전엔 보이지 않았던(아니 관심밖이어서 보지 않았을 지도 모른) 전사자 묘소 안내판.

 

현충원 묘소는 계급별로 구분이 되었기에 211지역, 128지역, 129지역에 각각 안장되어 있었다. 앞쪽이 128, 그 뒤가 129, 그 다음이 211지역이다. 그 윗쪽은 엄기선 사모님이 안장되어 있는 애국지사 묘역.

 

천안함 46용사는 계급에 관계없이 특별지역을 만들어 함께 안장되어 있었다.

 

당시 지도자의 의지와도 관계가 있는듯 하다.

 

211지역을 찾아가는데 윤영하소령 묘소가 보인다. 4376번이라는 묘지 번호가 있었지만 인터넷을 보니 작년에 연평해전 전사자를 알리는 표지판이 교체되었다는 글을 보았기에 표지판을 찾은것.

 

묘소 앞에는 연평해전 전단지와 해전 10주년을 맞아 함께 승선했던 전우들이 만들어준 기념패. 태극기과 음료수 몇병이 놓여있다.

 

 

연평해전 말미에 사망 보름전 윤영하소령이 월드컵을 무사히 치루고 나라를 잘 지키겠다는 인터뷰 영상이 나와 가슴을 뭉클하게 했었다.

 

인천출생. 향년 28세의 꽃다운 나이에 전사하였다.

 

비석 좌측에는 부모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영화에서처럼 실제로도 원칙주의자로 알려졌으며 따스한 마음도 겸비. 부친 윤두호씨도 예비역 해군 소령이다.

 

다음 찾아간 한상국 중사. 어제 인터넷을 보니 상사로 진급하였단다. 2002년 7월 승진예정이었는데 사망은 6월에. 시신을 찾은날은 7월이기에 7월 승진으로 보고 사후에 1계급 특진으로 상사가 되었다.

 

한상국상사의 시신은 배가 침몰한 후 한달만에 조타실에서 수습을 하였다. 당시 조타실을 끝까지 사수하느라 떨리는 손으로 키를 꽉 잡았기에 배가 쓰러지지 않고 바른 상태로 가라앉았다고 한다.(영화에서는 손을 키에 묶고 있었던것으로 나오는데 이것은 극화)

 

영화에서 가장 인간적인 모습으로 장병들을 보살피던 기억이 난다.

 

 

충남 보령생. 화랑무공훈장 수훈.

 

묘비에는 부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한상사의 부인은 남편이 죽은 후 수개월후 아이를 유산했으며 한국을 떠났다가 지금은 광주시에 특채되어 공무원생활을 하고 있단다.

 

연평해전에 극화되지 않은 세명의 중사는 나란히 안장되어 있었다. 한상국상사는 한달 후 시신이 발견되었기에 함께 안장되지 못한 연유에서다.

 

다른 연평해전 전사자 묘소처럼 사진과 동기생들의 기념패, 연평해전 포스터가 놓여있다.

 

 

 

의무병 박동혁의 묘소이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은듯 조화가 많이 놓여 있다. 영화에서는 박동혁 어머니가 벙어리로 나오는데 실제 그런건 아니라 한다. 아들 잃은 엄마가 무슨이야기를 할수 있는냐는 뜻으로 그리 설정했다고 한다.

 

박동혁은 3개월 생과 사의 사이에서 사투를 벌였지만 9월 국군수도병원에서 전사했다. 당시 그의 몸에서는 130여개의 파편이 나왔는데 모두 3kg에 달했다 하니 그 참상이란......

 

21살의 어린나이로 나라를 위해 싸우다 전사.

 

 

최근 동료들 또는 같은 의무실 장병들이 다녀간듯 하다.

 

비문 옆을 보니 다른 묘비는 전면에 이름, 뒷면에 사망일시및 장소만기록되어 있다. 천안함용사및 연평해전 용사들 묘비 좌우편엔 출생일과 장소, 부모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것이 특이하였다.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이어 두번째로 세워진 대전현충원. 이곳에도 국가를 위해 헌신한 수많은 분의 죽음으로 계속 터를 넓혀가고 있는 중이다. 그분들의 숭고한 죽음에 경의를 표한다.

 

 

연평해전 영화에 관한 이야기와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에 나온 연평해전 이야기 주소를 붙여본다.

http://blog.naver.com/yourh0use_?Redirect=Log&logNo=220412026198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72097&cid=46628&categoryId=46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