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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국내)/여행(경상도)

2011년 설날 가족여행(경주)

2011년 설 명절은 수~금요일까지여서 토, 일요일까지 합치면 5일간의 긴 연휴가 계속된다. 당초 우리 6남매는
이 시기에 해외여행을 가려 적립금까지 모았는데 시간들이 잘 맞질않아 해외여행은 취소하였다.
때문에 우리 가족은 이 기간을 이용하여 가족여행을 가기로 생각하여 일찌감치 경주에 있는 대명리조트를 3~5일
까지 예약을 하여 설날 가정예배를 드리고 경주로 향하였다.

이번 설날엔 우리 큰아들이 그동안 돈을 벌었다고
우리 3형제들에게 세뱃돈을 주었다. 큰 아들은 우리 삼형제에게 세뱃돈을 주고 작은 아들은 군에서 제대후 복학하는 막내동생 현중이및 3월 15일 군대가는 현욱에게 받는 세뱃돈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아들들이 제 몫을 하는것 같아 마음이 흐믓하였고 여행경비도 자식들이 일부 분담하여 잘 다녀 올 수 있었다.

설날 예배와 세배를 드리고 시간이 남아 각자 갈 길을 가기전 상서동 휴양림을 찾았다.
막내동생 가족이다. 맨 좌측이 이번 3월 15일 군에가는 현욱이. 운동을 좋아하고 교회에서도 많은 봉사를 하고 있다.
철물점을 운영하는 둘째남동생 가족. 가게를 운영해선지 매사에 꼼꼼함을 보이고 있다.
우리가족. 좌측은 서울서 휴대폰관련일을 하는 현상이. 우측은 수학교사를 하는 현철.
TV에도 보도된적이 있는 돌탑인데 80넘은 노인이 혼자서 쌓은 탑이다.
남대문이 불에 탄 후 남대문을 쌓아 올린모습. 작년 남전도회 야유회시 탑을 쌓은 노인과 이야기 한적이 있었는데 이처럼 훌륭한 탑을 완공해 놓았다.
만인산 휴양림의 명물 호떡도 사먹고..
두 동생은 각자 처가집을 가고 우리는 경주로 향하였다. 우리 장모님은 서산에 있는 처남댁에 가 있기에 지난 주일 인사를 하였다.건너편에 있는 호텔은 2년전 장로회수련회시 우리가 묵었던 코모도호텔이다.
대명리조트는 우리나라 리조트업계의 선두주자 역할을 하는곳이다. 한화리조트와 함께 가장 많은 체인점을 가지고 있는곳이다.
설날 당일이어선지 많은 사람이 모이지는 않았다. 로비에서 짐을 날랐는데 저녁식사후 짐을 살펴보니 카메라 가방이 보이지 않는다. 로비입구 주차장에서 꺼낸 기억은... 눈앞이 아찔하여 차엘 가봤지만 역시 없었고 로비에서도 습득한것이 없다고 한다. 사무실에가서 분실물 신고를 하려는데 천만 다행으로 사무실직원이 카메라가방을 습득하여 보관하고 있었다. 얼마나 감사하였는지. 감사에 대한 답으로 약소한 물품으로 사례를하였다.
우리의 숙소는 동관 963호. 4인실이다.
이곳 아쿠아 월드엔 겨울속 물놀이를 즐기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첫날은 휴식을 취하고 둘째날은 경주시내 관광, 마지막날은 동해안을 구경하기로 하였다. 둘째날 첫 여행지는 천마총.
30년전 신혼여행시 한복을 입은 아내의 모습에 반하여 많은 일본인들이 둘러서서 사진을 찍혔던 곳이다.
경주는 이번이 다섯번째인것 같다. 처음은 학교다닐때 수학여행, 두번째는 30년전 신혼여행. 그리고 2008년 6월 아내와 다시한번 찾았고 그해 가을 전국장로회 수련회. 이번 가족여행까지 다섯번째이다.
이번 경주여행은 아이들이 에게 옛날 수학여행의 기억을 살려주려고 찾았다.
경북 경주시 인왕동. 국보 제31호. 신라시대. 동양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천문대. 관측기구를 정상에 설치하고 춘분 ·추분 ·동지 ·하지 등의 24절기를 별을 통하여 측정하였고, 정자석을 동서남북의 방위를 가리키는 기준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2008년 6월에 왔을땐 너무 더워서 거닐기가 힘들었는데 금년엔 강추위가 계속되다가 설날 연휴부터 날씨가 완전히 풀려서 거닐기에 아주 좋은 날이었다.
석빙고는 얼음을 넣어두던 창고로 반월성 안의 북쪽 성루 위에 남북으로 길게 자리하고 있다. 남쪽에 마련된 출입구를 들어가면 계단을 통하여 밑으로 내려가게 되어 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바닥은 경사를 지어 물이 흘러 배수가 될 수 있게 만들었다. 지붕은 반원형이며 3곳에 환기통을 마련하여 바깥 공기와 통하게 하였다. 석비와 입구 이맛돌에 의하면, 조선 영조 14년(1738) 당시 조명겸이 나무로 된 빙고를 돌로 축조하였다는 것과, 4년 뒤에 서쪽에서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는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이 때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규모나 기법면에서 뛰어난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반달모양의 성이라 하여 반월성으로 불리는 토성입구.
삼국사기에 보면 주위가 1,023보(步)이며, 자연적인 언덕 위에 반월형으로 흙과 돌을 혼용하여 쌓았고, 여기에 신라 역대왕들의 궁성이 있다고 기록되었다. 《동경잡기(東京雜記)》에는 290년(유례왕 7) 큰 홍수로 월성이 무너져 이듬해 보수하였으며, 487년(소지왕 9)에 다시 이곳으로 옮겼다고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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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지마다 500원 ~ 4,000원의 입장료가 있었지만 가장 볼거리가 많은 경주박물관은 국립이어선지 무료입장.
성덕대왕신종. 일명 에밀레종앞에서.
아래 사진들은 천마총인근에서 발굴한 부장품들인데 그 수량이 엄청났다.
전시관 입구에 써있는 글귀가 인상깊었다.
드라마를 통해 유명세를 탄 선덕여왕릉. 신라엔 세명의 여왕이 있었는데 가장 먼저 된 여왕으로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긴 여왕이다.
릉 주변에 가득 자란 소나무들이 인상적이다.
경상도 음식은 맛이 별로여서 점심은 리조트에 와서 해 먹은후 오후엔 불국사와 토함산을 구경하였다. 다리가 아픈 아내는 숙소에서 쉬도록 하고...
언제보아도 멋진 불국사 전경.
개인적으로 신라시대 유적지중 최고라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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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보탑과 석가탑(불국사삼층석탑,국보 제21호)은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석탑으로, 높이도 10.4m로 같다. 절내의 대웅전과 자하문 사이의 뜰 동서쪽에 마주 보고 서 있는데, 동쪽탑이 다보탑이다. 다보탑은 특수형 탑을, 석가탑은 우리나라 일반형 석탑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두 탑을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이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할 때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법화경』의 내용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탑으로 구현하고자 하기 위함이다
다보탑과 석가탑(불국사삼층석탑,국보 제21호)은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석탑으로, 높이도 10.4m로 같다. 절내의 대웅전과 자하문 사이의 뜰 동서쪽에 마주 보고 서 있는데, 동쪽탑이 다보탑이다. 다보탑은 특수형 탑을, 석가탑은 우리나라 일반형 석탑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두 탑을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이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할 때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법화경』의 내용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탑으로 구현하고자 하기 위함이다
석가탑을 보면 2단의 기단(基壇)위에 세운 3층탑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지만, 다보탑은 그 층수를 헤아리기가 어렵다. 십(十)자 모양 평면의 기단에는 사방에 돌계단을 마련하고, 8각형의 탑신과 그 주위로는 네모난 난간을 돌렸다. 탑이 건립된 시기는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으로 추측된다. 목조건축의 복잡한 구조를 참신한 발상을 통해 산만하지 않게 표현한 뛰어난 작품으로, 4각, 8각, 원을 한 탑에서 짜임새있게 구성한 점, 각 부분의 길이·너비·두께를 일정하게 통일시킨 점 등은 8세기 통일신라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1박2일에서 숨은물건 찾이에 나왔던 황금돼지. 현판뒤에 숨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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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여행시는 석굴암 내부까지 관람이 허용되었는데 지금은 유리로 입구를 막아 이러한 암자를 통해서만 봃수있었다. 물론 사진은 촬영금지.
석굴암은 통일신라시대에 경주 토함산(吐含山)에 세워진 한국의 대표적인 석굴사찰이다. 신라인들의 신앙과 염원, 뛰어난 건축미, 성숙한 조각기법 등을 보여주는 역사 유적으로 국보 제24호 지정되었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되었다.
멀리 암자뒷편의 작은 동산안에 석굴암이 놓여있다.
안압지의 야경이다.
안압지는 월성(月城)의 북동쪽에 인접하였다. 《삼국사기》 674년(문무왕 14) 조(條)를 보면 궁성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花草)를 기르고 진금이수(珍禽異獸)를 양육하였다고 하였는데, 안압지는 바로 그때 판 못이며 임해전(臨海殿)에 딸린 것으로 추정된다. 1974년 이래의 준설공사와 고고학적 조사에 의하여 주목할 만한 유구(遺構)와 유물이 발견되었다. 동서 200m, 남북 180m의 구형(鉤形)으로 조성되었는데, 크고 작은 3개의 섬이 배치되었다.
수십년전 안압지를 대대적으로 발굴하며 새로운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연못 기슭과 섬에 실시된 호안공사(護岸工事)는 정교하고 도수로(導水路)와 배수로의 시설도 또한 교묘하다. 연못 바닥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와전류(瓦塼類)로서는 신라 특유의 우미(優美)한 무늬가 있는 것이 많은데, ‘儀鳳四年(679)’ 또는 ‘調露二年(680)’의 당나라 연호명(年號銘)이 있는 와전은 중요한 자료이다. 불교 예술품으로서 판상(板狀)의 금동여래삼존상(金銅如來三尊像)과 금동보살상(金銅菩薩像) 등의 우수한 작품이 있고, 유존(遺存)하는 예가 드문 목조의 배, 건축 부재, 목간(木簡) 등의 채취와 그 보존에 성공한 일은 귀중한 공적이다.
마지막날 아침.
숙소에서 기념촬영.
대실료는 현상이가 계산 하였다.
마지막날은 문무대왕릉및 호미곶을 다녀서 대전에 오기로 하였다. 가는길목에 있는 감은사지를 둘러 보았다.
두 탑은 복원이 되었지만 감은사는 터만 남아 있었다.
사적 제158호. 대왕암(大王岩)이라고도 한다. 삼국통일을 완수한 문무왕(文武王)은 통일 후 불안정안 국가의 안위를 위해 죽어서도 국가를 지킬 뜻을 가졌다. 그리하여 지의법사(智義法師)에게 유언으로, 자신의 시신(屍身)을 불식(佛式)에 따라 고문(庫門) 밖에서 화장하여 유골을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국가를 평안하게 지키도록(護國大龍) 하겠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유해를 육지에서 화장하여 동해의 대왕암 일대에 뿌리고 대석(大石)에 장례를 치렀다. 사람들은 왕의 유언을 믿어 그 대석을 대왕암이라고 불렀다. 대왕암은 육지에서 불과 200여 미터 떨어진 가까운 바다에 있다. 큰 바위가 주변을 둘러싸고 있고, 중앙에 약간의 넓은 공간이 있는데, 이 공간에 대석을 이동하여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중앙의 대왕암 주변을 큰 바위(화강암)가 둘러 싸고 있는데, 네 방향으로 물길이 나 있어 주변 바위는 네 부분으로 구분되어 있다. 자연적으로 물길이 나 있는 상태이나 약간의 인공을 가하여 튀어나온 부분을 떼어내어 물길이난 가운데 공간을 약간 가다듬은 흔적이 발견되었다.
갈매기 한마리가 사진을 찍어주길 바라는듯 나의 앞에서 날개만 퍼득이며 한참을 머울러 있다. 새우깡을 가져왔으면 좋을뻔 했는데..
화합 상생을 상징하는 조형물. 새천년기념관에서 촬영한 것이다.
등대박물관 호랑이상앞에서 이번여행의 마지막 가족사진.
저 우뚝 솟은 힘찬 손처럼 2011년엔 우리가정에 희망이 넘치는 한해가 되길 소원하며 3일간의 가족여행을 마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