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21일(일요일) 여행 6일째 어느덧 여행 후반부에 들어선다.
이날은 크로아티아 수도 자그레브를 구경하고 슬로베니아로 이동하는 날이다.
크로아티아 화폐를 마지막으로 사용해야 하는 날이기도 하였다.
크로아티아는 넥타이의 시초가 된 나라입니다.
넥타이의 유래에 대하여 인터넷에 나온글을 그대로 옮겨봅니다.넥타이의 유래는 알고보면 서글픕니다..
17세기 유럽의 "30년전쟁(1618~1648)" 당시, 프랑스 왕실에 용병으로 고용됐던 크로아티아 기병대는 목에 붉은 천을 매고 전장을 누볐다고 합니다.. 돌아오기 힘든 먼 길..전장으로 출정할때 연인이나 부인 ,,어머니로부터 목을 감싸는 옷감을 정표로 받아서 마음의 위안을 삼은데서 시작됐다고 하지만..실제로는 돌아오지 못한 그 누군가의 연인과 남편, 자식을 확인하는 수단이기도 했답니다..
출정하는 사랑하는 사람의 무사귀환을 간절히 또 간절히 빌며 매어주던 ..남아 있는 이들의 절박함의 표현인 것입니다. 혹시 돌아오지 못하면... 어디선가 우연히라도 ..찾을 수 있기를 바라는 ..입 밖으로 내기 조차 마음아픈 간절한 식별의 도구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 간절한 오랜 크로아티아의 풍습이 넥타이의 유래입니다....그후에 넥타이가 널리 퍼지게 된 사연을 살짝 퍼와봤습니다..
전쟁 초기의 크로아티아 기병대는 임시편성된 통일성 없는 집단이었기 때문에 전투력이 별로 높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엔 주로 적의 측방을 기습하거나 후방의 보급부대, 민가를 습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별다른 부대 명칭도 따로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냥 다들 '크로아티아인들(Croats)'이라 불렀다.
그런데 전쟁이 생각보다 길어지자, 크로아티아 기병대 내에 단합력이나 규율 같은 것이 생기기 시작했다.
규모와 활약도 점점 커졌다. 이렇게 되자 이들을 부를 정식 부대명칭이 필요했다.
그래서 프랑스군 지휘부는 이렇게 물어봤을 것이다. "너희 부대를 부를 호칭이 필요하다. 너희들을 뭐라고 부르면 되는가?"
그리고 어느 크로아티아 출신 지휘관이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우리는 '크르바타(Hrvata 혹은 Hrvat)'요." '크르바타'의 프랑스식 발음 (표기)은 '크라바트(Cravate)'였고 이는 곧 크로아티아 기병대의 부대명칭이 됐다.
그런데 'Hrvata'는 크로아티아어로 '크로아티아인'이란 뜻이었다. 그러니 'Croats'나 'Hrvata'나 'Cravate'나 그 뜻은 매한가지였다.
1648년, 30년전쟁이 끝났다. 파리에서는 개선 퍼레이드가 펼쳐졌다. 승자의 편에 섰던 크로아티아 기병대도 여기에 참가했다.
크로아티아 기병대가 말을 타고 화려한 복장으로 개선 행진을 할 때, 유독 파리 시민들의 눈을 끄는 것이 있었다. 바로 목에 맨 화려한 붉은색의 천이었다.
크라바트가 패션 아이템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은 것은 루이 14세 때부터였다.
1643년, 다섯 살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루이 14세는 30년전쟁이 끝나가는 1648년을 전후하여 왕권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그 수단 중 하나가 왕실의 법도를 강화하고 귀족의 복식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루이 14세는 목에 희고 긴 레이스 장식이 달린 천을 매고 다니면서, 다른 이들도 이를 착용하도록 권장했다.
나중에는 왕실 공식행사 참석의 필수 복장으로 지정했다.
루이 14세는 이를 '크라바트'라고 부르면서 "크라바트 착용에는 '30년전쟁'의 교훈을 되새기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말했다 한다.
물론 패션에 유난히 관심이 많았던 루이 14세 개인 취향이었을 뿐이라는 의견도 있다.
수천년 입었던 옷을 팽개치고 ...불과 백년 만에 넥타이를 매는것이 예의라고 생각하는 요금 우리의 옷 문화를 돌아보며 ... 먼 나라 크로아티아의 그 아스라한 아픈 넥타이의 사연이 먼 시간을 건너와 자꾸 짠하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