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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해외)/8. 베트남,캄보디아

12-7 앙크로왓트 남문

네째날은 이번여행의 하일라이트 앙코르 톰 구경가는 날.

앙코르는 왕도()를, 톰은 큰[]이라는 뜻을 나타내므로 앙코르톰은 '대왕도'라는 뜻이다. 현존하는 유구()는 자야바르만 7세가 왕국의 수도로서 1200년경에 조영()한 것이다. 1변 3 km인 성벽의 정사각형으로 주위를 둘러싸고, 중앙에는 세계의 중심으로 보이게 한 바이욘묘()가 높이 솟고, 그 동서남북으로 2추축대로()가

도시를 4분하며 2추축이 성벽과 만나는 곳에 왕도의 문이 4개, 왕궁에서 동으로 뻗은 대로 위에 1개, 모두 5개의 문이 있다.
이 5개의 문은 앞면에 돌의 커다란 뱀을 껴안은 거인상()의 열()을 난간으로 한 육교를 끼고 있으며, 문 자체는 거대한 4면의 얼굴을 한 탑문으로 되어 있다. 특히 이 유적의 중심부에 있는 바이욘묘는, 그보다 반세기 정도 앞서 세워진 앙코르와트와 함께 앙코르문화의 쌍벽을 이룬다.

 

앙코르왓트를 구경하기 위하여 정말 많은 관광객이 몰려들었다.

 

캄보디아의 송우진가이드와 한컷. 아내는 태국에 거주하고 이곳에서 독신 생활을 하고 있단다.

 

하루 관람료 20$. 입장티켓을 발행받기 위해 즉석 사진을 찍고있다.

 

다른사람의 이용방지를 위하여 사진까지 넣은 입장티켓이다.

 

앙코르 전반적 그림이다. 중앙 아래쪽 앙코르왓트가 우리일행이 처음간곳, 중앙 오른쪽부분이 툼 레이더 촬영지 타프롬. 중앙에서 약간 오른쪽이 바이욘사원. 우리가 방문한 곳은 이 세곳이다.

 

예전엔 항공 여행도 가능했다는데 지금은 장비가 없단다. 공중에서 바라본 앙코르왓트의 엄청난 규모.

 

역시 항공에서 촬영한 남쪽문 입구.

 

 

서양에서 예전에 지은 성을 보면 대부분 성 밖을 둘러 파서 물을 채워 놓고 성에서 밖으로 통하는 문은 한 군데만 만들어서 적의 침입을 막았다. 이렇게 성 주위를 물로 채운 것을 '해자'라고 한다. 캄보디아에서 본 사원들도 해자에 둘러 쌓인 곳이 많았다. 특히나 앙코르와트 또한 해자에 둘러 쌓여 있었다. 그런데 이 해자의 뜻이 조금 다르다. 이 것은 적의 침입을 막는 용도가 아니라 물 밖의 세상은 사람들이 사는 세계이고 물위에 다리를 건너 들어간 사원은 신의 세계라는 뜻이라고 한다.

 

해자를 가로지른 다리를 건너 앙코르왓트로 가는 중.

 

앙코르와트는 인도차이나 반도의 캄보디아에 있는, 동남아시아 최대의 역사 유적 중 하나이다. 유적은 톤레사프 호수에서 북쪽으로 약 2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앙코르 산(언덕) 정상에 자리잡고 있다. 주변에는 많은 사원 유적과 왕도였던 앙코르톰 유적도 있어서 이 지역 전체 유적을 앙코르 유적군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정글에 묻혀 있던 앙코르와트를 처음 학술적으로 조사했던 인물은 프랑스 출신의 박물학자인 앙리 무오였다. 그는 1860년 1월에 현지를 방문한 후 열병에 걸려 그 다음해인 1861년 10월에 숨을 거두었지만, 그의 사후 잡지에 게재된 조사 일지는 유럽에서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1863년부터 본격적인 조사가 이루어지게 되었고, 많은 유물들이 프랑스로 건너가 조사·전시되었다.

 

 

앙코르왓트는 12세기 후반 수리야바르만 2세에 의하여 건립되었다고 한다. 수리야바르만 2세(유명은 파라마비슈누로카)는 1113년에 태어나 1145년~1150년을 통치한 크메르 제국의 왕이다. 그는 앙코르왓을 지었으며, 이 사원을 힌두의 신인 비슈누에게 봉헌하였다. 그의 통치기간에 가장 기념비적 건축물이다. 수많은 전쟁과 강력한 통치로 인해 그는 역사학자들에게 크메르 제국의 가장 위대한 왕 중의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나가는 힌두교의 신명. <용>으로 한역되었는데, 본래는 중국의 용과 다르며, 뱀, 특히 코브라를 말한다. 뱀신 숭배는 이미 인더스 문명에서 존재했다고 추측된다. 아리아인은 고대부터 행하여진 뱀신 숭배를 점차로 수용해서 반신(半神)의 하나로 보게 되었다. 힌두교의 문헌에서는 나가(Nāga), 즉 사족(蛇族)은 파탈라(Pātāla)라고 하는 지저계에 산다고 한다. 바수키(Vāsuki), 기타 용왕이 그 세계를 통치하고 있는데 파탈라의 최하층에 원초의 뱀 아나타(Ananta)가 살며, 머리로 전세계의 무게를 바치고 있다. 나가는 가끔 인간의 모습으로 문학작품에 등장하며, 용의 딸은 매우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나가는 불전에서도 자주 언급되며, 천용 팔부 중의 하나이고 마찬가지로 팔부중에 속하는 마후라가(마호라가)는 큰뱀을 말한다. 버마 국경 근처의 나가랜드에는 나가족이라는 종족이 살고 있으며, 나가의 후예라고 하여서 독자적인 습속을 보존하고 있다. 나가는 또한 동남아시아에서는 다양한 토착적 신화와도 결부되어서 우주의 최하층을 이루는 명계, 수계, 지하계를 대표한다. 바리의 신화에서는 11층으로 된 우주가 거북이 등에 타고, 이 거북을 나가가 휘감고 있다. 북태국에서는 나가는 토지령이며, 가옥의 주주는 나가의 머리 위에 선다고 생각되었다. 그 신화적 성격은 양의적으로 선에도 악에도 통하며, 시원의 혼돈이나 암흑을 나타내기도 한다. 또한 각지의 신화나 미술 중에 천계, 생명, 정의, 질서 등을 나타내는 영장을 가르다 등과 대립적으로 나타나며, 우주론적 대립을 상징한다

</용>

 

함께한 일행들의 모습을 담아 보았다.

 

 

 

신전에 세겨진 조각품은 정말 정교하였다. 이곳에 사용된 돌들은 이지역에는 없었던곳으로 먼 지역에서 이동하여 새겨놓은것.,

 

 

 

 

남문을 지나서도 한참을 걸어야 본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일행 두번째 단체사진 촬영.

 

이곳 앙코르왓트에 대한 기록은 전혀 남아있지않아 이곳에 얽힌 이야기는 모두다 추에 의해서 이야기 된다고 한다. 위의 건물은 좌우에 동일하게 지어진 것인데 도서관으로 추정하고 있단다.

 

 

 

 

 

 

도서관건물안에서 한컷. 벌써 얼굴이 불그스레 타오른다.

 

 

 

 

이곳이 앙코르왓트를 배경으로한 사진의 최적지란다. 연못에 아련히 사원의 그림자가 보이고.... 아침녁이라 역광이라 후레쉬를 이용.

 

건기여서 물의 수위는 많이 줄은듯 하다.

 

EBS 세계여행편을 보니 새벽녁에 사원위로 떠오르는 일출을 보려고 수많은 사람이 다녀간다고 한다.

 

오후에 왔다면 빛의 흐름때문에 사진이 좋았을 터인데.... 사실 사진을 전문적으로 찍으려면 촬영지에 따라 오전, 오후를 잘 선택해 가야한다.,

 

 

 

 

더위때문에 잠시 휴식하는 중.

 

가이드가 2인 1개씩 야자열매를 주어 빨대를 이용하여 물을 먹었다. 맛은 밍밍한대다 양이 많아 다 먹지는 못하였다.

 

 

이제 본격적인 사원방문을 위하여.... 사원 네방향으로 통로가 있는데 숲 가운데로 길게 길이 나있다.

 

앙코르 유적지는 9~15세기 인도차이나 반도 중앙부를 지배한 크메르 제국의 흥망성쇠를 엿볼 수 있는 곳이다. 그중 앙코르와트는 앙코르의 건축과 예술이 집대성된 걸작으로 꼽힌다. 11세기 후반 앙코르 왕조의 수리야 바르만 2세 때 지었다. 오랫동안 밀림에 뒤덮인 채 세상에 알려지지 않던 이 거대한 유적을 1860년 식물학자 앙리 무오가 발견했다. 그 후 세상에 알려져 중국의 만리장성, 이집트의 파라오 등과 함께 세상에 가장 신비로운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앙코르와트는 한 변이 4㎞에 이르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남쪽과 서쪽으로 넓은 수로가 있다. 독특한 점은 서쪽 면이 정면으로 자리한 것이다. 앙코르와트 외곽을 둘러싼 해자는 바다를, 성벽은 히말라야 산맥을, 그리고 높이 솟은 사원은 수미산을 상징한다. 일출과 일몰 시간에 맞춰 앙코르와트를 찾는다면 더욱 신비롭고 웅장한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이 사원의 뛰어난 미술적 건축양식은 인도의 영향도 받아들이기는 하였지만 건물의 형태나 석조장식(石彫裝飾) 등 모든 면에서 앙코르왕조의 독자적인 양식을 지니고 있다. 특히 전장(全長) 760m에 이르는 제1회랑벽(回廊壁)의 부조, 제2회랑 안의 돌로 조형한 샘물[泉水], 제3회랑 내부의 화려한 십자형 주랑(柱廊)과 탑 등은 뛰어난 구조물이다. 조형에서는 하늘의 무희(舞姬) 아프사라스, 여러 개의 머리를 마치 부채처럼 치켜든 커다란 뱀, 창문·기둥의 장식조각 등이 돋보인다. 앙코르왕조는 13세기 말부터 쇠망하기 시작하여 15세기경에는 완전히 멸망함에 따라 앙코르와트도 정글 속에 묻혀버렸다

 

 

 

사원의 주요 건축물은 웅대한 방추형 중앙사당탑(中央祠堂塔)과 탑의 동서남북에 십자형으로 뻗은 익랑, 그것을 둘러싼 3중의 회랑과 회랑의 네 모서리에 우뚝 솟은 거대한 탑으로 이루어졌는데, 구성은 입체적이고 중앙은 약간 높다. 회랑의 높이는 제1회랑(215×187m)이 4m, 제2회랑(115×100m)이 12m, 제3회랑(60×60m)이 25m이다. 세계의 중심이며 신들의 자리를 뜻하는 수미산(須彌山)은 돌을 사용하여 인공적으로 쌓아놓았으며, 높이 59m의 중앙사당탑의 탑 끝에서 3중으로 둘러싼 회랑의 사각탑 끝은 선으로 연결해보면 사각추(四角錐)의 피라미드 모양이 된다

 

가이드의 설명은 계속되고 있지만 ㅜㅜㅜ 녹음기를 가지고 다닐수도 없고...

 

 

긴 회랑에 새겨진 당시의 문화상이 정확히 묘사되어 있다.

 

1,000년이 넘도록 유적지가 남아있는 이유중 하나는 이지역에 지진이 없었던것. 중국의 장가계도 태풍, 지진등이 없기에 엄청난 돌기둥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앙코르와트로부터 우리는 당시 캄보디아의 인력 동원 능력, 종교적 성향 및 열정, 국부(國富), 예술 수준, 우주관, 도시의 구획 방식 등을 읽을 수 있다. 게다가 수리야바르만 2세는 앙코르와트 내부에 약 1.5㎞에 이르는 긴 회랑을 따라 정교한 부조를 새겨 놓음으로써 당시의 전쟁, 군사 기술, 크메르인은 물론 각 민족(참파, 타이인 등)의 복식 및 외향, 무기, 동식물 등에 대한 매우 방대한 자료를 인류에게 남겨 주었다. 예를 들면, 그의 모습임이 분명한 캄보디아 왕 및 그 앞에 모여 있는 신하들의 부조도 백 마디의 글보다 왕과 신속의 관계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1차 사료이다

 

앞에서 이곳에 건축된 돌은 이지역이 아닌 다른곳에서 가져왔다고 했는데 운반방법은 바위에 구멍을 뚫어 물을붙고 나무를 꽂으면 나무가 불어서 단단한 지침대가 되고 그를 이용하여 운반했다고 한다.

 

 

 

 

앙코르와트가 차지하고 있는 면적은 210㏊(약 650,000평)이다. 지상을 상징하는 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벽의 총 길이는 5.5㎞이며, 이는 다시 폭이 약 200m인 해자로 둘러쌓여 있다. 해자는 힌두적 우주관의 관점에서 볼 때 대양(大洋)을 상징한다. 사원의 중앙에는 총 다섯 개의 탑이 있다. 그중에서 우주의 중심인 메루산을 상징하는 탑은 높이가 65m이다(Rooney 1997 : 129-130). 건축에 약 30년 걸렸다는 이 사원은 쿨렌산에서 운반해 온 사암으로 만들어졌다.

 

 

중앙탑으로 오르는 계단은 70도가 넘는 급경사이다. 계단을 이렇게 가파르게 만든 이유는 신전에 올라갈때 두손과 두발을 이용하여 겸손히 올라가라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

 

 

 

우리일행중 두명은 중앙사원에 올라가지 못하였다. 아내는 힘들것 같아 포기, 제일 막둥이 소녀는 나이제한때문에.....

 

 

 

사원에 오르기위해서는 금지사항이 있다. 모자를 써서는 안되고(일단 계단을 오르면 관계없지만). 무릎이 보이는 반바지, 나시티를 입고서는 오르지 못하도록 하였다. 신께대한 예의로...

 

신을 향한 인간의 무한한 헌신이 있었기에 이러한 건축물이 가능하였을 것이다. 1,000년전 이곳에는 100만명이나 되는 엄청난 사람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동남아시아에서 종교 건축물들이 일반적으로 동쪽을 향하고 있는데 비해 앙코르와트는 정반대로 서쪽을 향해 있다. 동남아시아 연구자들은 별로 설득력 있게 들리지 않는 이유를 소개해 왔다. 즉, 왕이 힌두교의 발상지인 인도를 바라보고 싶어서였다는 것이다. 좀더 낭만적인 설명은 앙코르와트에서 맞을 수 있는 석양의 노을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아름다워서 수리야바르만 2세가 그 방향을 택했다는 것이다

 

이곳 앙코르왓트는 비교적 보존이 잘되었지만 그래도 군데군데 훼손된 건축물들이 보인다.

 

 

중앙의 다섯 개 탑과 사원을 둘러싼 벽의 네 모서리에 있는 네 개의 탑은 전부 금으로 장식되었다고 하니(Hall 1955 : 105) 그 장관은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 중앙의 탑 안에는 수리야바르만의 경배 대상이며 장차 자신이 죽은 뒤에 합일할 신으로 비슈누신이 서쪽을 향한 채 모셔져, 앞이마에 박힌 에메랄드 보석이 석양을 반사해 눈부신 빛을 발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찾아볼 수 없다. 이미 캄보디아 사회에 많이 퍼져 있던 불교의 흔적도 있는데, 1,000개의 불상을 모신 공간을 따로 만들어 놓은 것이 그것이다.

 

이 사원의 뛰어난 미술적 건축양식은 인도의 영향도 받아들이기는 하였지만 건물의 형태나 석조장식(石彫裝飾) 등 모든 면에서 앙코르왕조의 독자적인 양식을 지니고 있다. 특히 전장(全長) 760m에 이르는 제1회랑벽(回廊壁)의 부조, 제2회랑 안의 돌로 조형한 샘물[泉水], 제3회랑 내부의 화려한 십자형 주랑(柱廊)과 탑 등은 뛰어난 구조물이다. 조형에서는 하늘의 무희(舞姬) 아프사라스, 여러 개의 머리를 마치 부채처럼 치켜든 커다란 뱀, 창문·기둥의 장식조각 등이 돋보인다. 앙코르왕조는 13세기 말부터 쇠망하기 시작하여 15세기경에는 완전히 멸망함에 따라 앙코르와트도 정글 속에 묻혀버렸다.

 

 

사원 중앙건물아래서 한 소녀가 기도를 드리고 있다.

 

처음엔 신심이 깊은 소녀라 생각했는데 촬영을 위한 제스쳐였다.

 

숲 끝으로는 해자가 있는데 나무가 우거진탓인지 해자의 모습은 보이질 않는다.

 

 

 

 

 

중앙사원에서 내려오는길도 만만치 않다. 앞선 사람들이 후들후들거리며 늦장을 부리면 한없이 기다려야만 했다.

 

 

내려와서 다시한번 바라본 중앙사원모습. 현대에도 건축하기 어려울듯한 건축물을 당시 어떻게 쌓아올렸는지는 불가사의한 일.

 

앉아있는 일행들에게 HIP을 자랑하나???

 

내려오지 못한 일행을 기다리며 긴 회랑을 잠시 구경.

 

프랑스, 일본등에서 이 사원의 전면적 보수를 제안했으나 하루 입장료가 5억원이나 되기에 전면적 보수보다는 부분보수를 하고 있단다.

 

 

1861년 표본채집을 위해 정글에 들른 프랑스 박물학자가 이곳을 발견, 그때부터 다시 알려졌다. 그러나 이 지역은 1972년부터 외부인에게 폐쇄된 이후 낮이면 베트남군이, 밤에는 크메르루지의 게릴라가 번갈아 장악하면서 전화(戰禍)와 약탈로 훼손되어 수많은 불상이 조각난 채 나뒹굴고 대부분이 외국으로 유출되어, 완전한 복구는 어려운 상태이다. 1982년 집계를 보면 앙코르와트의 중요 유물 30점 이상이 없어졌고, 전체 유적의 70%가 복원불능의 상태로 파괴되었으며, 사원 근처 왕궁의 유물 약 1,000점이 도난·파괴되었다. 유네스코에서는 1983년 이 유적지의 복원을 위해 조사단의 파견을 캄보디아 당국에 통보한 바 있다

 

 

정말 화려하고 정교한 건축물이 가득한 이곳이었다.

 

 

이제 사원 반대편을 돌아 나오는 중.

 

 

신혼부부인것 같다. 캄보디아 고유 의상을 입고 사진촬영중.

 

 

 

수많은 앙코르의 이야기는 글로 다 쓸수없어 인터넷을 이용하여 설명을 달았다. 앙코르의 이야기를 미리 숙지못하고 온것에 대한 아쉬움도 남는다.

 

앙코르왓트를 구경하고 우리 일행은 점심식사를 위해 시내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