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으로의 시간여행(3-1. 왕궁리유적지및 미륵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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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으로의 시간여행.hwp

더위를 싫어해 여름여행은 잘 나서질 않는데 7월 마지막 토요일 장마의 끝자락과 태풍이 올라온다는 일기를

기회삼아 익산여행을 계획하였다.

지도를 보고 하루 일정을 잡아보니 가고 싶은곳이 일곱군데.

모두 여행 할 수 있을런지 모르겠지만 일단 유적지부터 찾아 나서기로 하였다.

첫 여행지는 왕궁리 유적지.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왕금마을 뒷산 구릉지대를 지역 주민들은 ‘모질메’라고 부르는데, 이 곳은 예로부터 마한 혹은 백제의 궁궐자리로 알려진 곳이다. 위치는 금마산에서 남으로 약 3km쯤 떨어져 야트막하게 전주행 국도변에 자리하고 있는 대지이다. 이 성은 구릉지를 일부 깎아내리고 주변은 흙으로 쌓아올려 세단으로 나누어 평지를 조성하고 그 안에 건물을 배치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일명‘왕궁평성’,‘왕궁리토성’ 이라고 불리는 이 성은 1976년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의 발굴결과 남북의 길이는 약 450m, 동서의 폭이 약 230m의 반듯한 장방형을 이루고 있음이 밝혀졌다. 성은 일반적인 담장으로 보기에는 규모가 큰 폭이 약 3.2m정도의 궁궐 성벽이 일부 노출되어 백제의 궁성지로서의 가능성이 한층 커지고 있다. 그리고 성의 축조기법이 백제양식이었으며, 백제시대의 기와 및 와당을 비롯하여 토기, 생활용구 등이 출토되고 있어 이 성(城)이 지닌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 성은 역사적으로 백제 무왕의 천도 혹은 별도지로서 운영된 궁성으로 알려져 있으며, 통일신라시대의 보덕국, 안승의 궁성, 그리고 후백제 견훤이 잠시 궁성으로 이용했던 것으로 알려진 유적이다. 현재 왕궁평성내에는 1997년 1월 1일로 국보 289호로 지정된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과 주춧돌, 백제 시대의 정원석으로 보이는 관상석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인근지역에 익산 미륵사지가 9.6 ㎞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사실 미륵사지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왕궁리유적지는 생소하였다. 영상관에서 보니 백제 무왕(어려서는 소동)이 이곳에 도읍을 정하려 했단다.

 

익산 왕궁리와 미륵사지가 이번에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사진은 왕궁리 5층석탑을 헤체하는 작업 사진이다.

 

문화유산 지정에 맞추어 5층석탑이 복원되었다. 조형처럼 현재는 5층석탑 한나만 복원된 상태.

 

이곳에서는 금 세공의 흔적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익산 보석단지가 있는 연유를 이날 알게되었다.

 

출토된 유적 모습. 수세식과 같은 화장실 모습도 찾아냈다고 한다.

 

인형따라 갑자기 춤을 추는 최권사..

 

전시관을 나서 유적지를 향하였다. 앞으로 터전에 채워질 채석들이다.

 

 

하늘이 잔뜩 흐렸지만 여행하기는 안성마춤. 석탑 옆으로 나란히 자리한 소나무와 어울려 멋진 경치를 자아낸다.

 

사진찍느라 늦장 부리는 사이 최권사는 석탑인근으로 얼라가고 있다.

 

국보 제289호. 높이 약 8.5m. 석탑은 마한(馬韓)의 도읍지로 알려진 곳에서 남쪽으로 2㎞ 정도 뻗은 산줄기 끝의 낮은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조선시대 말기에 간행된 익산읍지인『금마지(金馬誌)』에는 “왕궁탑은 폐허가 된 궁터 앞에 높이 10장으로 돌을 쌓은 것이다. 속전에는 마한시대에 만들었다고 한다”라고 전한다. 이전에는 흙으로 만든 받침을 둔 희귀한 석탑으로 알려졌지만, 1965년에 해체하여 보수하면서 원래 돌로 만든 받침을 갖추었음이 밝혀져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되었다.

 

 

 

약 20일전 세계문화유산 등재 축하. 이번에 등재된 유산은 공주의 공산성과 송산리 고분군, 부여의 관북리 유적과 정림사터, 부소산성·능산리고분군, 부여나성, 전북 익산 미륵사터와 왕궁리 유적 이다. 다음 일정은 공주와 부여의 유적지...

 

이어서 미륵사지를 찾았다. 이 절터역시 백제 무왕시대에 건립된것.

 

3탑3금당 동양최대의 사찰 미륵사지는 백제 최대의 사찰로 30대 무왕(600~641년)에 의해 창건되었고, 17세기경에 폐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륵사지가 발굴되기 이전에는 백제 창건당시에 세워진 미륵사지 서탑(국보 11호) 1기, 그리고 석탑의 북쪽과 동북쪽 건물들의 주춧돌과 통일신라시대에 사찰의 정면 양쪽에 세워진 당간지주 1쌍(보물 236호)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미륵사는 신라의 침략을 불교의 힘으로 막기 위한 호국 사찰로써 성격을 띠고 세워졌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미륵사는 백제가 망할 때 까지 왕실 사찰로 혹은 호국 사찰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사찰이었다.

 

백제 최대의 가람인 미륵사 창건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신라 선화공주와 혼인한 후 왕이 된 마동 즉, 무왕(백제 30대왕 600-641)이 선화공주와 함께 용화산(현재의 미륵산) 사자사의 지명법사를 찾아가던 중이었다. 그 때 갑자기 연못 속에서 미륵삼존이 출현하여, 이를 계기로 미륵사를 창건하게 되었다. 삼존을 위하여 전(금당), 탑, 낭무(화랑)을 세웠다고 한다. 이와 달리 미륵사의 창건에는 무왕과 선화공주의 신앙만이 아니라 정치적 목적이 있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즉 백제의 국력을 확장하기 위해 마한 세력의 중심이었던 이곳 금마에 미륵사를 세웠을 거라는 추측이다.

 

복원될 미륵사지이다. 좌우측 탑은 복원또는 복원중이지만 다른 탑과 금당은 언제 복원될런지는 모르겠다.

 

미륵사지 전시관에 보관중인 금 세공품.

 

탑을 헤체했을때 가장 밑단 정 중앙에 부처님 사리가 발견되었단다.

 

 

부처님 사리모습(살짝 의문은 부처님 사리가 나온 우리나라 탑이 너무 많다는것. 물론 진신사리겠지만 중국도, 인도도 그리 많을텐데 ...) 어찌되었든 보석처럼 영롱한 사리 모습이다.

 

 

천편적 사진에서 벗어나고자 엉거추춤 포즈를 취한다는것이.... 우린 평상시 사진을 담는것이 가장 자연스러움.

 

미륵사지 앞에는 두개의 동형 연못이 자리잡고 있다.

 

내부로 들어가는 문이 보여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최권사.

 

반대편에 있는 탑 모습이다. 내부로 통하는 문이 사방에 나 있다. (내부는 그냥 통로일뿐..)

 

현재 복원중에 있는 탑의 기단 모습이다. 2017년 완성을 목표로 작업을 하고 있단다.

 

2층까지는 관람을 할 수 있도록 시설을 해놓았다.

 

 

 

 

 

두 석탑앞에는 엄청난 유적 석물들이 놓여있다. 이를 기본으로 모든 건축물이 완공되기까지는 엄청난 시간이 걸릴듯 하다.

 

미륵사지 석탑은 국보 제11호로 현재 높이 14.24m이고 우리나라 최고, 최대의 석탑이다. 석탑은 거의 전면이 붕괴되어 동북면 한귀퉁이의 6층까지만 남아있으나 본래는 9층으로 추정된다. 미륵사지 석탑은 1974~1975년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조사에 의하여 동쪽탑은 목탑이 아니라 석탑임이 밝혀져 이른바 동서 쌍탑의 배치였음을 알게 되었다. 동탑은 그 뒤 발굴조사에 의해서 9층으로 확인되어 1993년에 9층(높이 27.67m)으로 복원되었다. 이 석탑을 우리나라 최고의 석탑으로 보고 있는 이유는 이 탑의 양식이 그 이전에 성행하였던 목탑의 각부 양식을 나무 대신 돌로써 충실하게 재현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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