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열의사 기념관을 가다(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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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

1902년 출생하여 1974년 북한에서 사망.

관동대지진당시 항일사상단체를 이끌고 있었는데 일본국왕을 폭살하려 했다는 누명을 쓰고 사형언도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후 22년간 옥살이.

그에대하여 이제까지 아는건 아무것도 없었다.  몇개월전 그의 영화를 보기전 까지는~~~~

그의 영화를 보고 문경에 그의 기념관이 있다는 이야길 듣고 비오는 광복절 아침 문경으로 향하였다.

박열의사 기념관은 그의 생가터에 자리잡고 있다. 비가오는 날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의 발자취를 살펴보고 있었다.

기념관 입구에 세워진 커다란 문. 우측에 생가터와 기념관, 좌측에 박열의 연인이며 사상을 함께했던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의 무덤이 있다.

박열의 부인 가네코의 무덤. 그녀는 1926년 일본에서 옥살이 하던중 자결하여 일본에 묻혔으나 투쟁동지들이 유골을 빼내어 박열의 고향인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가네코의 무덤과 기념관 사이에 있는 낮으막한 동산.

그 동산 중앙에 작은 정자가 놓여있다. 비를 잔뜩 머금은 동자의 모습이 아름답기만 하다.

기념관에 들어서자 우측에 영화포스터가 놓여있다. 이준익감독과 가네코역을 열연한 한국인배우 최희서가 사인을 한 포스터. 이준익감독이 영화를 만들때 수집한 자료의 80%가 이곳 기념관에서 제공했단다.

박열의사의 흉상이 기념관 1층 정면에 놓여있다.

기념관은 2개층으로 되어 있는데 1층엔 가네코에 관해서, 2층은 박열의사에 관한 자료가 가득히 놓여있었다.

1949년 재경 함양박씨 초대 종친회장에 당선 된후 기념촬영.

박열과 가네코의 이야기를 담은 글.

박열의사가 출옥후 민단단장으로 재임시 사용하던 가방이란다.

박열을 처음 만났을 당시의 가네코. 일본에서는 요즈음 가네코코스를 여행하는 사람이 많이 있단다. 사상이 다르지만 그녀의 순진한 사랑을 동경해서 일까?

가네코가 감옥에서 자살한 내용을 보도한 신문기사. 그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한국으로 보내기로 하였단다.

한국인 박열을 사랑하고 함께 옥살이를 하였던 가네코의 생은 22세의 짧은 나이로 마감되었다.

박열을 그리는 단가..

가네코는 박열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었기 때문에 조국을 등지고 박열의 사상에 동조하게 된다.

결국 박열과 함께 재판을 받고 옥살이 하던중 죽음을 맞이하게 된 가네코.

2층에는 박열의 행적을 중점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6.25전쟁중 납북되어 그에대한 조명이 약했지만 그 후 그의 연구가 활발해 지면서 노태우대통령시절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는다. 김영삼대통령때는 국가유공자로 지정.

관복과 한복을 입고 법정에 선 박열과 가네코. 영화에서도 이 장면을 잘 표현하고 있었다.

박열은 법정에서 한국인이 관동대지진 당시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저항없이 일본 법정에 선다.

해방 후 이승만대통령, 김구선생과 조우하는 박열.

이승만대통령의 소개로 맥아더 사령관을 만나는 박열.

그는 6.25때 납북되어 그곳에서도 항일운동을 펼치다 1974년 사망했단다.

일본 재판정에서 만세를 부르는 박열.

박열의 출옥후 지인들과 함께한 사진.

기념관 전경이다. 외진 마을이라 기념관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박열의 생가터와 기념관. 비가 부슬부슬 내리지만 많은이들이 이곳을 찾았다.

문경은 문경새재와 세트장으로 유명하여 그간 몇차례 온곳이다. 비가오지만 기념관에서 30km떨어진 경천호에 사진촬영 명소가 있다기에 핸들을 돌렸다.

이곳이 사진촬영 명소. 비가 많이 오는 관계로 물안개가 자욱하다.

밝은 모습이 아니어서 아쉬웠지만 그런대로 운치가 있다.

사람 입술의 형상을 하고 있는 섬모습.

나무아래 놓여 있는 벤취가 정겨웁다.

귀로길은 경천호를 끼도 가는길이었는데 녹음이 우거져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물을 머금은 파란 가로수가 드라이브를 즐겁게 한다.

호수를 끼고 이어지는 멋진 드라이브 길.

빗속이지만 그래서 더 운치가 있는 멋진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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