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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국내)/여행(대전)

남간정사에서 봄의 기운을 보다

우암사적공원내 남간정사를 담으려 카메라를 챙겼다.

당초는 4월 9일 오후가 벚꽃나무등이 만개했을것으로 생각하여 찾기로 하였는데 4월 8일 부부합창을 가는길에

교통사고를 당하여 아내와 내가 병원신세를 지는바람에 일정을 늦추었다.

비보호 좌회전을 하다 급속도로 직진하는 차에 조수석을 바친것.

난 목요일 퇴원을 하였지만 조수석에 있던 아내는 통증등 후유증이 심하여 다음주에나 결과를 본 후 퇴원예정이다.

이날 4월 13일은 센트럴구역이 강천산으로 야유회를 가기로 한날인데 야유회는 다음으로 미루었기에

침에 아내 병실에 들렀다가 우암공원을 향하였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조선후기 정치계와 사상계를 호령했던 인물이다. 조광조와 더불어 조선을 유교의 나라로 만든 장본인이었던 그는 우리나라 학자 중 ‘자(子)’자를 붙인 유일한 인물로 역사상 가장 방대한 문집인 일명 [송자대전(宋子大全)]을 남겼다.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호. 조선 숙종 때의 거유 송시열(宋時烈)이 강학하던 유서깊은 곳으로, 낮은 야산 기슭의 계곡을 배경으로 남향하여 건립되었다.
 
경내의 입구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에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된 기국정이 있고, 뒤편 높은 곳에는 정면 4칸, 측면 2칸에 홑처마 맞배지붕으로 된 남간정사가 있다. 남간정사는 정면 4칸 중 중앙 2칸 통칸에 우물마루의 넓은 대청을 드린 후 그 좌측편에는 전후 통칸의 온돌방을 드렸다.
 
그 우측편에는 뒤쪽 1칸을 온돌방으로 하고 앞쪽 1칸은 온돌아궁이의 함실(函室 : 방바닥 밑에 직접 불을 때게 만든 방)을 설치하기 위하여 대청마루면보다 조금 높여 누마루로 꾸몄다. 대청에는 4분합띠살문 또는 판장문을 달았고, 온돌방에는 쌍여닫이 또는 외여닫이 띠살문을 달아 출입하도록 하였다.
 
구조는 건물 전면으로는 8각 장초석을 놓았으나, 계곡의 물이 흐르는 대청 밑에는 장초석을 놓고 원형기둥을 세웠으며, 또한 건물의 네귀에는 활주(活柱 : 추녀 뿌리를 받는 가는 기둥)를 세워 길게 뻗은 처마를 받쳐 주고 있다.
 
기둥 상부에 건물의 내외방향으로 꽂혀 있는 양봉(樑奉)의 끝을 익공뿌리처럼 깎아 마치 초익공(初翼工)처럼 보이며, 지붕틀은 5량가구로서 겹처마 팔작지붕을 이루고 있다.
 
뒤편 기슭에서 흐르는 계곡 물을 이 건물의 대청 밑을 통해, 앞에 마련된 넓은 연당(蓮塘)에 모이도록 하여 경내의 운치를 한층 더하여주고 있는 남간정사는 조선시대 별당건축의 양식적인 측면과 함께 우리나라 정원 조경사에 있어서 독특한 경지를 이루게 한 계획으로 그 의의가 크다.

이곳 남간정사는 보건전문대학을 다닐때부터 알고지낸곳으로 사진을 무척 담고싶었지만 그간 틈을 내지 못하였다가 오늘에서야 발걸음을 옮겼다.

 

남간정사 외부엔 담이 둘러져 있기에 까치발을 들어 사진을 찍어야 했다. 이날 사진동호회원들이 많이 왔었는데 사다리까지 준비하는 치밀함이 ^^

 

남간정사 정문이다. 아쉽게도 입장금지.

 

남간정사에서 낮은 구릉을 타고 오르면 송시열선생이 후학들을 지도했던 별당이 전개된다.

 

인근 산을 오르는 등산객들이 자주 눈에 띄였다.

 

우암이 강학하던곳을 향하여 오르는 길.

 

잘 다듬어진 냇가와 개나리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강학당 입구인 명정문.

 

 

 

인함각이다. 모든 괴로움을 참고 또 참아야 한다는 뜻의 선비공부방.

  

이곳은 명숙각인데 모든일을 명확하게 하고 마음을 밝고 맑게 하라는 뜻.

  

중앙에 우뚝 서 있는 이직당은 '마음을 돋게 쓰는 집'이라는 뜻의 강당으로 우암선생의 직(直) 사상을 담고 있다.

  

 

심결재 : 매사를 심사숙고하여 결정하라는 뜻을 가진 선비 공부방.

  

이곳은 견뢰재인데 우암선생의 마지막교훈을 받들고 선현의 가르침을 굳게 지키라는 뜻이라 한다.

 

 

뒷편에서 잡아본 강학당.

 

 

강학당에서 우암자료실로 가는길이다.

 

입구로 나오면서 남간정사를 다시한번 잡아본다.

 

 

 

 

주자장에서 바라본 남간정사.

 

 

이곳에 온김에 모교 대전보건전문대학을 찾았다. 졸업한지 20년이 넘어 다시 찾은곳.

 

예전에 없던 학교건물이 우람하게 서 있다. 40나이에 학교를 가기에 에피소드도 많았다.

 

시험보는 날
나도 수험생인데 아이들이 교수님, 교수님하면서 이것저것 묻기도 하고...

수위아저씨는 내가 새로온 교수인줄 알고 반갑게 나와서 인사를 한다. 이 아저씨와는 나중에 식사를 하며 웃음을 지었던 일도 있다.

 

야간 40명의 학생중 내 또래가 5명이어서 같은 나이또래의 교수들과 잘 어울려 지냈던 기억이 새롭다.

 

대학교수인 최장로가 항상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은 젊은이와 함께한때문으로 생각한다. 나 역시 이들과 지내는 동안엔 젊은이 였으니까...

 

이 건물이 예전 대학본관건물이었다. 지금은 맨 뒤쪽으로 밀려 노후한 건물이 되었다.

 

미래병원에 입원했을때 방사선실장이 그때 동기였던 친구라서 많은(?)도움으 받았다.

 

방사선과 교수실과 강의실복도. 예전엔 가장 잘 나가는 학과였는데 지금은 가장 후진곳에 위치한것 같다.

 

강의실 입구에서....

 

학교로 올라오는 길이다. 예전엔 아름다운 나무가 무척 많았는데 93년도 대전엑스포개최당시 나무 상당수를 엑스포장으로 옮겨간것으로 기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