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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바이지도자

  • 오늘 방한 두바이지도자 셰이크 모하마드는
  • 개방성과 합리성 갖춘 ‘경마광’ 절대군주
  • 연합뉴스
    입력 : 2007.05.21 07:07
    • “사람에겐 두 가지 선택이 있다. 타인을 따라가는 것과 주도권을 쥐는 것. 그리고 우리는 개척자가 되길 간절히 희망한다”

      ‘기적의 리더십’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세계적인 유명 인사로 떠오른 두바이 지도자 겸 아랍에미리트연합(UAE) 부통령ㆍ총리인 셰이크 모하마드 빈 라시드 알-막툼(58)이 21일 한국을 처음 방문한다.

      지난해 한국에서는 ‘두바이 열풍’이 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두바이와 셰이크 모하마드 지도자에 대한 관심이 최고조에 달했다.

      바로 ‘기적’의 주인공이 경제사절단 등 120여명의 수행단을 이끌고 한국에 오는 셈이다.

      그의 명성에 걸맞게 2005년 미국 타임지는 ‘세계를 변화시킨 지도자 100명’에 그를 선정했다.

      1949년생인 그는 학업성적이 뛰어나 초등학교를 월반(越班)하기도 했을 만큼 총명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네 형제 가운데 삼남이지만 그의 총명함을 알아 챈 선친인 전 두바이 지도자 셰이크 라시드는 그를 특히 눈여겨 두고 후계자 수업을 착착 진행한다.

      17세 되던 1966년 그는 셰이크 라시드의 뜻에 따라 영국 케임브리지에 있는 명문 어학교육 기관인 벨어학스쿨에 입학한다.

      이곳에서 당시 모하마드 왕자는 세계 각 대륙에서 온 친구와 친분을 쌓게 되는데 이는 훗날 그의 뛰어난 국제 감각과 영어실력의 배경이 된다.

      벨어학스쿨을 마친 그는 영국군 훈련기지가 있는 영국 남부 올더숏의 몽스 사관학교에 입교한 해 혹독한 영국식 군사훈련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곳에서도 그는 졸업시 가장 높은 성적을 받은 외국인 사관생도에 주어지는 ‘영예의 검’을 받을 정도로 영특함을 발휘한다.

      그에 대한 선친의 신뢰는 셰이크 라시드가 1968년 2월 고(故) 셰이크 자예드 UAE 대통령 겸 아부다비 지도자와 UAE 설립을 합의하기 위해 만났을 때 그와 동행한 데서 엿볼 수 있다.

      셰이크 라시드는 당시 영국에서 수학중이던 자신의 셋째 아들을 불러 역사적인 UAE 설립 합의의 현장을 지켜보게 했음은 물론 셰이크 자예드에게 ‘눈도장’을 찍게 했다.

      영국에서 돌아온 셰이크 모하마드는 그해 11월 두바이 경찰총수로 임명돼 공직에 입문했고 UAE가 영국에서 독립, 연방국가를 설립했던 1971년 12월엔 22세의 나이에 국방장관에 올라 연합방위군 설립을 주도했다.

      당시 세계 최연소 장관으로도 기록됐다.

      그의 수완을 인정한 그의 선친은 그에게 중동에서 가장 큰 조선 시설인 두바이 건식 도크를 맡겼고 1977년 8월엔 두바이 국제공항 운영이라는 중책을 떠맡았다.

      그가 두바이 국제공항 운영의 총책임자로 오른 것은 현재 두바이가 관광산업을 차세대 동력으로 추진하게 된 바탕이 된다.

      그는 이때부터 두바이를 항공과 관광의 허브로 개발할 원대한 꿈을 꾸며 미래를 대비한다.

      1985년 1월 셰이크 모하마드는 당시 두바이 관광청의 사무국장을 어느 날 아침 갑자기 불러 “항공사를 가능한 한 빨리 만들려 한다. 얼마가 필요하고 얼마나 걸리느냐”라고 물었다.

      사무국장은 “1천만 달러”라고 답했고 모하마드는 9개월 뒤 현재 세계 항공업계에서 가장 빠른 성장세로 주목받고 있는 에미레이츠 항공을 출범하는 추진력을 보였다.

      에미레이츠 항공과 두바이 국제공항은 지금 그의 의도대로 두바이를 중동ㆍ유럽ㆍ아프리카ㆍ아시아를 아우르는 관광과 항공의 허브로 부상시키는 데 중심축이 됐다.

      셰이크 모하마드는 같은 해 항구를 낀 제벨알리 자유무역지대 건설까지 맡아 두바이를 물류의 중심지로 바꿔 놓는 놀라운 추진력을 보인다.

      이른바 ‘7성호텔’로 유명한 부르즈 알-아랍 호텔과 인공위성에서도 보인다는 야자수 모양의 인공섬 ‘팜 아일랜드’ 프로젝트도 그의 아이디어에서 나왔다.

      그의 이런 강력한 추진력 뒤엔 절대 군주제에선 상상할 수 없는, ‘아라비아의 카멜롯’이라고 불렸을 만큼 자문단의 자유로운 토론을 포용한 그의 개방성과 합리성이 있다.

      또 다른 산유국의 절대 왕정이 유럽과 북미로 석유수입금을 투자할 때 두바이의 알-막툼가(家)는 ‘두바이도 유럽이나 북미 못지않게 잘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사회 인프라에 석유수입금을 집중 투자한 것도 두바이가 이룬 기적의 기반이다.

      셰이크 모하마드는 또 경마광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영국 유학시절 경마에 빠져든 그는 현재 1천500필의 명마를 소유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내 피엔 말에 대한 사랑이 흐르고 있다”라고 말할 정도로 그의 경마 사랑은 유별나다.

      하지만 그가 말을 특히 좋아하는 이유도 자못 아랍의 지도자답다.

      “말이 수천 년간 아랍 민족과 함께 했음을 잊지 말라. 말은 우리의 역사를 상징하며 말에 타는 것은 그저 말의 등에 오르는 게 아니라 숭고하고 고결한 것”이라는 게 그의 말 예찬론이다.